얼마 전 연구원들은 그에게 ‘최고테스트책임자(Chief Testing Officer)’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쏟아져 나오는 거의 모든 신제품을 사무실이나 집에 가져가 직접 써보고 보완 작업을 지시하기 때문. 고객의 입장에서 기능적이고 편리한지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렇게 그의 손을 거쳐서 나온 디지털TV,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PDP, 광 스토리지 및 부호분할 다중접속(CDMA) 휴대전화는 이미 세계 톱 클래스에 진입했다.
제품 개발에 대한 이런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백 사장의 하루 일과는 보통 6시 반에 집을 떠나 조찬 회의로 시작된다. 계속되는 마라톤 회의, 연구소 방문, 저녁 식사 약속까지 그의 하루는 쉴 틈이 없다. 그런데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는 저녁 9시 반이면 집에 들어와 햄 라디오 앞에 앉는다.
경력 30년이 넘는 무선통신 마니아인 그는 “골프 모르는 사람들이 골프 채널 보는 사람 이해 못하듯 햄도 일단 빠지면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집에 설치한 무선햄 안테나만 해도 열댓개는 족히 된다. 아내가 “당신 죽으면 무덤에 안테나는 꼭 설치해 주겠다”고 했을 정도.
똑딱똑딱 만들기 좋아하는 그의 취미와 엔지니어에 대한 꿈은 중3 때 과학반에 들어가 라디오를 조립하면서 커가기 시작했다. 경기고 재학 시절, 공부는 뒷전이고 밤낮 없이 청계천 전자부품 시장을 뒤져 라디오, 전축을 만드는 데 매달렸다가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 부모가 학교에 불려가기도 했다. 그는 “공부만 하는 것보다 이런 취미 활동을 한 것이 통신공학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멋진 제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그의 꿈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졸업 뒤 그를 대학이 아닌 기업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미국 기업에서 20년 동안 일하면서 디지털TV를 개발해 30여개의 특허를 따냈다. 표준 규격을 확립해 ‘디지털 TV의 아버지’란 별명까지 얻었다. 대부분 박사학위만 따면 교수가 되려고 귀국하는 동료들과 달리 그는 미국에서 ‘메이저리그’에 도전했고, 올해는 미국 가전산업 명예의 전당에 영원히 이름을 새기게 됐다.
24년에 걸친 긴 외국생활을 마치고 그는 1998년 LG전자에서 중책을 맡았다. 보수가 이전 직장의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LG가 디지털TV를 성장 동력으로 삼기로 했고, 고국의 기술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도 이끌렸다. 귀국한 그가 세운 가장 큰 공은 디지털TV와 PDP에 연구 역량을 집중해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고 차세대TV 분야에서 LG를 최고의 기업으로 끌어올린 것.
“LG는 행운을 건진 셈입니다. MIT 박사이고, 디지털TV라면 세계에서 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천재라서가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그의 탁월한 선견과 일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 때문입니다.”
서울대 전기공학과 동기생인 이상철 전 정보통신부장관의 백 사장에 대한 평가다.
“기업은 돈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일단 개발을 하면 100만개 이상 팔릴 제품을 만들어야 하고요.”
백 사장은 기술만 안다고 경영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고객의 입장에서 기술을 바라볼 줄 아는 엔지니어가 경영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CTO가 되는 또 다른 비결은 없냐는 질문에 그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비전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 철저한 실험주의 정신,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추는 것”이라고 귀띔한다.
▼백우현 사장은▼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최고 명문대학인 MIT에서 통신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제너럴 인스트루먼트(GI)와 퀄컴에서 20년 동안 일하면서 디지털TV 신호의 압축과 암호화 방식을 개발했다. 90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디지털 HDTV 규격을 제안해 일본, 유럽에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 개발한 아날로그 HDTV 기술을 무력화시키고 다기능을 갖는 고화질 디지털TV 탄생의 길을 활짝 열었다. 미국 최대의 신문인 ‘USA투데이’는 그에게 ‘디지털TV의 아버지’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디지털TV의 표준화와 기술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99년에는 미국 방송통신 분야 최고 권위상인 클라크 상을 수상했다. 98년 LG전자 CTO로 스카우트된 그는 올해 초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리더십과 혁신으로 전 세계 가전산업을 이끈 11명’에 꼽혀 미국 가전산업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청소년에게 한마디▼
MIT를 나와도 슈퍼마켓을 하는 사람이 있다. 좋은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는 일에 흥미와 관심을 갖는 게 성공의 열쇠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 하는 일이 재미있고 만족스럽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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