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원래 우리 몸에는 지방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단백질, 탄수화물과 함께 인체를 구성하는 3대 영양소의 하나다. 그렇다면 면역계는 인체의 지방 역시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지 않고 ‘아군’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몸이 염증으로 가득해지는 끔찍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면역계가 같은 지방에 대해 ‘적’과 ‘아군’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대 의대 미생물학교실 성승용 교수(39)가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면역학의 권위지인 ‘네이처 리뷰 이뮤놀로지’ 6월호에 제시해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있다.
▽물과 친하지 않은 꼬리가 주범=지방을 분자 수준에서 들여다보면 성냥개비처럼 생겼다. 물과 친한 ‘머리’와 친하지 않은 ‘꼬리’로 구성돼 있다. 염증을 일으키는 주범은 바로 꼬리다. 같은 지방이라도 꼬리를 감추고 있으면 인체 면역계가 ‘아군’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삼겹살 같은 동물성 지방은 꼬리가 많이 노출돼 있다. 그렇다고 삼겹살을 먹을 때마다 일일이 면역계가 작동하기에는 너무 피곤한 일. 그래서 간에서 분비되는 쓸개즙이 꼬리를 감추게 만든다. 바깥쪽은 머리끼리, 안쪽은 꼬리끼리 붙은 둥근 공 모양으로 지방을 ‘성형’시키는 것(그림). 식물성 지방은 대부분 원래 이런 모습을 하고 있어 안심할 수 있다.
우리 몸의 지방은 어떨까. 지방은 인체에서 크게 두 곳에 위치한다. 먼저 인체를 구성하는 60조개의 세포가 모두 지방으로 이뤄진 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세포 안팎으로 꼬리를 감추기 위해 이중막 형태다(그림). 또 하나는 ‘식량’을 비축해놓기 위해 지방을 잡아먹은 채 몸 곳곳(특히 배)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지방세포’다. 이렇게 철저히 꼬리를 감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몸의 면역계는 평소에 잠잠한 것이다.
▽알레르기 암 등 난치병 치료에 새 시각=몸에 이물질이 들어왔을 때 과도하게 면역계가 반응해 피부염을 일으키는 알레르기. 한 가지 원인물질은 식물의 꽃가루다. 그런데 꽃가루는 분명 ‘죽은’ 세포다. 살아있는 병균이 아닌 죽은 세포가 어떻게 몸에 염증을 일으킬까.
성 교수의 이론대로라면 명쾌한 해답이 나온다. 죽은 세포의 경우 세포막이 터져있기 때문에 지방의 꼬리가 노출돼 있다. 만일 쓸개즙의 기능을 흉내내는 약제를 개발할 수 있다면 알레르기를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암 치료에서는 반대로 꼬리를 일부러 노출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암세포는 분명 ‘적’이지만 면역계가 작동을 하지 않아 제멋대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성 교수는 “암환자에게 꼬리가 노출된 지방성분을 면역증강제로 사용하면 죽어있던 면역계가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암세포와 싸울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는 의미다.
▽‘빌 게이츠 연구비’ 지원 신청=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매년 ‘제3세계 어린이 백신 연구’에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2억달러(약 2400억원)를 책정했다. 성 교수팀은 전 세계 1500여개 연구팀 가운데 1차 관문을 통과한 400개 팀에 속해 있다. 올해 12월에 최종 판정이 난다.
그는 “이 연구비를 따내면 앞으로 4, 5년간 암백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며 “한국은 기초의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적어 아쉽다”고 말했다.
서울대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95년 군대에 갔을 때 운이 좋게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고분자실험실에서 ‘공중보건의’로 복무했다. 이때 물과 친한 성분과 친하지 않은 성분을 생쥐에게 투입했을 때 염증의 정도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알고 현재의 연구 아이디어를 얻었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기자 wolf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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