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물 판정 점점 어려워
올림픽 경기에서 도핑 검사가 공식 채택된 것은 1968년 멕시코시티대회에서다. 당시 검사 대상에 오른 약물은 20여종류. 그런데 올해에는 무려 150여종 이상에 달한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긴 해도 적발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근육의 성장을 촉진하는 성장호르몬이 대표 사례.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도핑콘트롤센터장 김동현 박사는 “성장호르몬은 정상적인 인간에게도 분비되기 때문에 인공산과 자연산을 구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성장호르몬의 경우 정상인과 약물복용자를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은 혈액 mL당 불과 수ng(나노그램·1ng은 10억분의 1g) 정도의 양이다. 이런 극미량 수준에서 기준수치를 약간 넘어서는 것을 측정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투여한 지 1시간 내에 분해돼 버리기 때문에 적시에 발견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기준수치를 넘어선 이유가 선수의 선천적인 체질 때문인지 약물복용 때문인지를 판정하기 힘들다는 점. 김 박사는 “이번 올림픽에서 성장호르몬 검사가 시행되겠지만 만일 1등을 한 선수의 수치가 기준값을 넘었다 해도 과연 메달을 박탈할 정도가 될지는 논란거리”라고 설명했다.
● 쏟아지는 신종 약물
지난해 파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단거리 부문을 석권한 캘리 화이트. 경기 후 신경 흥분제의 일종(모다피닐)을 투여한 사실이 드러나 메달을 박탈당하고 이번 올림픽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모다피닐은 이전까지 도핑 검사 대상에 오르지 않았던 신종 약물. 화이트 덕분에 이번 올림픽에서는 정식 금지약물로 지정됐다.
과학전문지 ‘네이처’는 4일자 기사에서 이처럼 과학자들이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약물이 늘어나는 추세를 지적했다. 한 가지 사례가 전립선암을 치료하는 약물인 바이칼루타마이드. 이 약물은 남성호르몬을 감소시킴으로써 암 성장을 억제하는데, 만일 선수가 남성호르몬을 많이 복용한 경우 그 농도를 감소시켜 도핑 검사를 통과할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영국 런던칼리지 존 아너 박사는 “문제는 이 약물이 기존에 연구가 비교적 많이 진행돼 온 스테로이드계가 아니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질환 치료제가 개발될수록 도핑 검사 대상 약물의 수가 늘어나는 셈.
●‘유전자 도핑’ 출현 당황
6월 24일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에는 어른에게서나 볼 수 있는 불뚝불뚝한 팔과 다리를 갖춘 5세가 채 안된 한 어린이의 사례가 소개됐다.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이 아이의 근육은 동년배보다 크기가 2배나 됐다. 원인은 인체에서 근육의 성장을 적절히 억제하는 단백질(마이어스태틴)을 만드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것. 7년 전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구원들이 쥐의 세포에서 마이어스태틴 유전자를 변형시킴으로써 ‘슈퍼마우스’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인간에게서 동일 유전자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 임상적으로 처음 밝혀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유전자가 근육위축증 등 각종 난치성 근육질환을 치료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운동선수들이 이 유전자를 주입해 근력을 향상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이른바 ‘유전자 도핑’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것.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선영 교수는 “생쥐를 상대로 근육을 강화시키는 유전자를 주입한 결과 불과 이틀 만에 근육에서 새로운 단백질이 생성됐다는 보고가 있다”며 “만일 올림픽 선수가 적혈구를 증가시켜 산소공급을 늘리거나 근력을 강화시키는 유전자를 투여한다면 현재의 도핑 검사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전자의 구조는 사람마다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은 외신을 통해 이번 올림픽이 끝난 후 수년 내에 도래할 ‘유전자 도핑 시대’를 막는 일을 선결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벌써부터 입을 모으고 있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기자 wolf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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