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느닷없이 “헤어져!”… 혹시 경계성 인격장애?

  • 입력 2004년 8월 22일 17시 17분


“그동안 고마웠어요. 우린 좋은 친구였죠?”

사귄 지 며칠 안 된 그녀가 느닷없이 까닭 모를 이별을 선언했다.

충격과 실망으로 술독에 뛰어들기 전에 한 번쯤 의심해 보자. 너무도 변덕스러운 그녀, 혹시 버림받을 게 두려워 습관적으로 먼저 관계를 끊는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는 아닌지.

요즘 20대 여성 관객의 꾸준한 호응을 받고 있는 영화 ‘얼굴 없는 미녀’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소재로 하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 석원(김태우)과 경계성 인격 장애 환자 지수(김혜수)의 위태로운 관계 맺기와 헤어짐이 이야기의 축.

아내를 잃고 외롭게 지내던 석원은 지수를 상담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느껴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지수는 어느 날 갑자기 짤막한 이별 통고만을 남기고 석원을 떠난다.

관객은 “도대체 지수가 석원을 버리는 이유가 뭐냐, 뜬금없다”고 불평하지만 바로 그 ‘이유 없는 돌변’이 경계성 인격장애의 전형적 증상이다.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는 무엇이든 확 좋아했다가 금방 싫어하기를 반복한다. 그 대상에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도 포함된다.

몇 주를 주기로 희비의 감정이 바뀌는 조울증과는 다르다. 심할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좋고 싫음이 뒤집혀 종잡을 수가 없다.

그 좋고 싫음에는 중간단계가 없다.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 누군가를 숭배할 정도로 한없이 높이 평가했다가도 사소한 실망으로 금세 저주를 퍼붓는다. 전적으로 의지하던 연인이라도 접촉사고가 났을 때 즉시 전화를 받지 않으면 ‘몹쓸 놈’ 취급한다.

일반인 100명 중 1, 2명에게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 여성 환자가 많은 것도 특징.

원인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생후 9∼18개월경에 받았던 ‘버림받은 상태’의 느낌이 무의식에 남아 스스로를 자꾸 비슷한 상황으로 몰아간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이론.

“나를 알게 되면 누구든 날 버려. 그리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극중 지수의 대사는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가 가진 두려움을 잘 나타낸다.

보통 정신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면서 감정의 중간단계를 갖도록 유도하지만 완치는 어렵다. 일부 환자는 영화 속 지수처럼 의사를 지배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육체적으로 유혹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의사들은 영화 속에 등장한 최면치료는 권장하지 않는다. 환자 대부분이 살의에 가까운 폭력성을 감추고 있어 최면 상태에서 감정 폭발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움말=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류인균 교수, 삼성서울병원 신경정신과 이동수 교수)

손택균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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