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교수의 별명은 ‘아연 박사’. 아연 가루를 많이 들이마시면 오한과 고열이 생긴다. 그래서 별명을 들으면 금속제련소에서 발생하는 직업병을 연구하는 학자가 떠오르기 쉽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뇌 안에 존재하는 ‘천연 아연’이다.
“뇌세포 안에는 극미량의 아연이 존재해요. 평소에는 다른 신경세포에 신호를 전달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지나치게 많아지면 세포를 죽게 만들죠.”
고 교수는 1981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스승은 노벨상 수상에 근접했다고 알려진 한국계 과학자 데니스 최(52).
흥미롭게도 데니스 최 박사는 조미료 성분의 일종인 ‘글루타메이트’ 전문가다. 뇌 신경세포에서 글루타메이트가 과도하게 분비되면 독성이 발생해 뇌중풍 등 각종 질환을 낳는다. 스승과 제자 모두 뇌와는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엉뚱한’ 소재를 택한 셈.
아연이 뇌세포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1950년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고 교수는 아연이 글루타메이트 못지 않은 독성 물질이라는 점을 규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학 첫 해부터 최근까지 미국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6편이나 관련 논문을 게재했다. 고 교수 연구팀이 1997년 과학기술부가 ‘노벨상 수상자 양성’을 목표로 추진한 창의적 연구진흥사업단의 하나로 선정된 것은 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성과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2002년에는 생쥐실험을 통해 알츠하이머병(노인성 치매)을 일으키는 독성 단백질(베타아밀로이드)이 아연 때문에 많이 축적된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 치매 치료제 개발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현재 고 교수는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연구프로젝트를 신청하는 데 분주하다. 인체 내 포도당이 분해돼 만들어진 파이러베이트라는 물질이 아연에 의한 세포의 사망을 막는다는 연구 결과를 임상적으로 테스트하기 위해서다. 교통사고로 뇌가 손상된 환자가 대상. 자신의 ‘기초연구’ 성과가 환자에게 적용될 날이 멀지 않았다 .
하지만 요즘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내년이면 과기부의 창의적 연구진흥사업단의 지원이 끝납니다. 그런데 정부의 후속 지원 프로그램이 아직 불확실해요. 어쩔 수 없이 외국에서 프로젝트를 찾아다녀야 하는 형편이죠.” 김훈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wolf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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