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말린 통이 널브러져 있는 계단을 올라 녹슨 자물쇠를 열자 40평 남짓한 옥상에 철제 컨테이너 한 개가 나타났다. 컨테이너 구석에는 표본 상자 수십 개가 비닐봉지에 싸인 채 쓰레기처럼 쌓여 있었다.
이 상자 안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말라붙은 희귀 동물 표본이 담겨 있었다. 상자에 쌓인 수북한 먼지는 컨테이너가 들어선 1997년 이후 표본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줬다.
이 대학 송성준(宋聖準) 연구교수는 “컨테이너는 가건물이어서 구청에서 철거 요청이 계속 들어온다”며 “표본실이 갖춰야 할 환풍장치와 에어컨도 없이 불법으로 전기를 끌어와 불만 밝히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최대 규모의 희귀 동식물 표본을 보유한 서울대 자연대 생명과학부가 공간 부족으로 표본들을 폐기할 위기에 놓였다. 생명과학부는 2006년 새 건물인 BK동으로 이전을 앞두고 기존 표본조차 보관할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생명공학기술(BT) 등 응용학문에 대한 지원은 크게 늘고 있지만 기초학문인 생물분류학 등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귀중한 표본 방치=현재 서울대 자연대와 농업생명대가 보유한 동식물 표본은 약 68만 점. 특히 자연대가 보유한 식물 표본 20만 점은 현재 남한 내에 유일하게 남은 북한 식물 표본으로 연구가치가 매우 높다. 하지만 이들 동식물 표본이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1997년 교수들이 사비를 들여 설치한 생명과학부 옥상 컨테이너에는 약 1만 점의 동물 표본이 정리되어 있다. 정리되지 않은 동물 표본은 약 5만 점이며 곤충 표본 수십만 점은 관리 부실로 이미 삭아 버린 상황이다. 수천 점의 어류 조류 포유류의 박제 표본도 관리 부실로 폐기 직전 상태다. 식물 표본도 교수 연구실 캐비닛 등에 쌓여 있고 곤충이 들끓어 훼손되고 있다.
이 대학 생명공학부 김원(金元) 교수는 “한 번도 넓은 공간에 펼쳐 놓고 세어 본 적이 없어 정확한 표본 수조차 파악이 안 된다”며 “1년에 채집되는 약 1000개의 샘플 가운데 60%가량이 공간 부족과 관리 부실로 변형되거나 부서지고 있다”고 말했다.
수년 전 희귀 곤충인 ‘갑옷바퀴’를 발견한 생명공학부 최재천(崔在天) 교수는 고민 끝에 이 표본을 프랑스 파리국립자연사박물관에 보냈다. 그는 “마땅한 표본실이 없어 표본의 소실이나 분실 등을 우려해 되찾아 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국으로 표본을 보냈다”고 말했다.
▽기초과학 인식 부족=생물분류학과 같은 기초학문의 위기는 눈앞에 보이는 기술개발 투자에만 연구비가 집중하는 탓이다.
생명과학부 박종욱(朴鍾郁) 교수는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교수 가운데 3분의 1가량은 연구비 지원을 한 푼도 받지 못한다”며 “신물질 개발에 초석이 되는 기초학문이 고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의 경우 모든 생물 연구에 분류학자가 따라붙어 약제 추출에 대한 조언을 해 신약 개발로 엄청난 이익을 얻기도 한다. 세계적인 해열진통제인 독일 바이엘사의 아스피린도 버드나무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들어졌다. 외국 대학은 전담 직원과 자원봉사자 등이 동식물 표본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서울대 농생대 표본관장 장진성(張珍成) 교수는 “학교는 늘 예산 부족을 이유로 표본을 보관할 공간마저 마련해 주지 않는다”면서 “동식물 표본이 공간만 차지하는 쓰레기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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