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젖병’ 빠는 우리 아이… 왜?

  • 입력 2006년 10월 20일 03시 04분


아기들은 TV에 나오는 젖병을 실물로 착각해 화면 앞으로 다가가 빨려고 한다. 이런 행동은 아기의 뇌가 실물과 표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아기들은 TV에 나오는 젖병을 실물로 착각해 화면 앞으로 다가가 빨려고 한다. 이런 행동은 아기의 뇌가 실물과 표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아기들이 TV에 다가가 입을 벌리고 빨려는 행동을 하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아기들은 광고에 나오는 젖병이 마치 실물인 양 열심히 빨아댄다. “지지”하며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 ‘그러다 말겠지’하고 넘겨 버리기 일쑤지만 그런 행동이 눈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다. 현대 과학은 아이들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해석할까.》

○ “아이는 젖병 광고를 빤다”

맛도 없는 그림을 먹으려는 아기의 행동은 실물과 표상을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뇌에는 대상을 인식하는 부위와 행동을 결정하는 부위가 서로 다르다. 사람이 어떤 그림을 보면 인식 담당 부위가 활성화되고 곧이어 행동을 명령하는 뇌 회로가 켜진다. 나이가 들면서 아이들은 조금씩 행동 집행 부분의 활동을 억제하는 능력이 생긴다.

하지만 생후 2년은 이런 억제기능이 채 형성되지 않은 시기. 이 또래 아이들은 작은 장난감 의자나 모형 자동차를 보면 앉거나 타려는 행동을 보인다.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뇌 부위가 작동할 뿐 ‘가짜’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기의 인지와 관련한 재미있는 실험이 하나 있다. 미국 버지니아대 심리학과 주디 디로시 교수팀은 2005년 생후 18∼30개월 된 아기들을 데리고 실험했다. 연구팀은 아기들에게 작은 모형가구로 꾸민 모형방에 장난감 개가 숨어 있는 위치를 보여준 뒤 똑같은 형태와 재질로 꾸민 실재 방에서 같은 위치에 숨겨 놓은 장난감 개를 찾는지 관찰했다.

실험 결과 아기들은 실재 방에서는 장난감 개를 찾지 못했다. 이는 아기가 모형방과 실재 방의 대응 관계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

그렇다고 아기의 인지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림’ 젖병을 빨다가 그것이 진짜 젖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순간 아기는 더 이상 그림 젖병을 찾지 않는다.

이화여대 심리학과 방희정 교수는 “그림을 손으로 만져서 알아보려는 충동은 생후 1∼2년 뒤부터 줄어들며 복잡한 사고를 관장하는 전두피질이 집중적으로 발달하는 3세경부터 이 ‘혼란’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표상’과 ‘실재’를 혼동하는 아기의 행동은 성추행 수사와 치료에 응용된다. 성추행을 당한 충격으로 입을 닫은 아동에게 인형을 주고 반응을 살피면 추행 상황을 추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경우 표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른과 다르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다.

○ ‘때 이른 블록 교재 오히려 역효과’

이 같은 사실은 최근 유행하는 유아용 블록이나 일부 체험 교재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한다. 부모들의 기대와 달리 상황에 따라 이들 교재가 교육 효과가 거의 없거나 역기능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

실재와 표상 간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숫자나 글자를 표상하는 블록, 막대 등은 비효율적일 수 있다. 오히려 사진이나 그림이 아이들의 학습 능력 향상에 더 기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이나 사진의 경우 2차원이고 표상하는 대상은 3차원이어서 아이가 이 둘을 혼동할 가능성이 낮은 반면, 3차원 모형은 3차원 세계를 보여 주기 때문에 혼란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 살배기 아이에게 플라스틱 장난감 글자로 글을 가르칠 때 글자가 갖는 의미가 오히려 희석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이 또래 아이에게 장난감 글자는 뜻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닌 그저 흥미로운 장난감으로 간주될 뿐이라는 해석이다. ‘ㄱ’자를 가르치려다 자칫 플라스틱 덩어리를 ‘ㄱ’으로 오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숫자의 경우도 6, 7세 아이들에게 블록 같은 대용물을 써서 덧셈과 뺄셈을 가르치는 것이 직접 쓰면서 가르칠 때보다 시간이 3배 더 걸린다는 결과도 나왔다.

방 교수는 “아이가 바라보는 세계는 어른이 보는 세계와 전혀 다르다”며 “대상물을 사용해 아이에게 글자나 숫자를 가르치기 전에 아이들의 인지 발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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