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연구실은 10억분의 1m 크기까지 볼 수 있는 현미경을 만드는 데 필요한 ‘X선 회절 이미징’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에 있는 초대형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하겠다고 신청했다. 국내에 있는 포항방사광가속기보다 가속전압이 훨씬 높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현지 연구실에 X선 광원을 빼곤 실험에 필요한 도구가 전혀 설치돼 있지 않았던 것. 선진국에서도 시도하지 않은 실험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했다.
고심 끝에 ‘실험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직접 갖고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날부터 시료용기와 진공부품, X선 감지기 등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을 싸는 데 꼬박 1주일이 걸렸다. 싸놓고 보니 무게가 35∼50kg이나 되는 커다란 상자가 10개가 넘었다. 이걸 무슨 수로 공항까지 가져갈지 난감했다. 하는 수 없이 이삿짐센터 화물차까지 동원했다.
가까스로 공항에 도착하자 이번엔 수속 절차에서 발목이 잡혔다. “이렇게 무거운 짐은 안 됩니다.” “미국 공항에서는 짐꾼들이 이렇게 무거운 짐은 나르지 않습니다.” 항공사 직원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불가능하다는 말만 연발했다.
“성공하면 한국이 세계 선두를 달릴 수 있는 중요한 실험 장비입니다. 꼭 실어야 해요.” 사정 반, 협박 반으로 겨우 짐을 실었다. 그동안 기내에서는 안내 방송이 나가고 있었다. “일부 늦게 탑승하는 승객들로 인해 이륙이 지연돼 매우 죄송합니다.”
드디어 아르곤국립연구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미국 측 연구원들은 차마 말은 못 했지만 불가능한 실험이라고 단정하는 눈치였다. 사흘 밤을 새운 끝에 우리는 가져간 장비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세상에, 실험실을 통째로 들고 왔어요?” 미국 연구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실험실’을 들고 국경을 넘기를 벌써 몇 차례. 우리 연구원들은 이제 이삿짐을 싸고, 항공사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까다로운 통관 절차를 거치는 일에 이력이 났다. 간혹 “실험실을 좀 두고 다니면 안 될까요?” 하며 피곤에 절어 볼멘소리를 하는 학생을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얘들아, 세계적인 실험을 하려면 이 정도 고생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니?
노도영 광주과학기술원 신소재공학과 교수 dynoh@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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