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터와 경험의 충돌
‘예보관 A 씨는 당황했다. 슈퍼컴퓨터가 내일 강수량을 자그마치 500mm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지역 최고 강수량은 300mm. 하루에 이렇게 많은 양의 비가 한꺼번에 내릴 가능성은 극히 적다. 그렇다면 첨단 슈퍼컴퓨터가 내놓은 데이터가 틀렸단 말인가.’
당신이 예보관이라면 경험과 컴퓨터 중 어느 쪽을 믿겠는가. 분명 쉬운 선택이 아니다. 만약 예보관이 개인의 지식과 경험에 더 비중을 두고 슈퍼컴퓨터가 제시한 강수량을 좀 줄여 예보했다고 하자. 다음 날 정말 슈퍼컴퓨터가 예측한 만큼 비가 온다면 일기예보는 잘못된 것이 된다.
실제로 2002년 태풍 ‘루사’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태풍 같은 재해기상의 경우 슈퍼컴퓨터의 데이터와 예보관의 경험이 어긋나는 경우가 종종 생길 수 있다.
슈퍼컴퓨터가 가동하는 수치예보 모델은 지구대기 공간을 바둑판처럼 일정한 간격의 수많은 격자로 나눈다. 기온, 바람, 수증기량 등 기상요소가 시간에 따라 바뀌는 모습을 나타낸 여러 개의 복잡한 방정식을 격자마다 몇 분 간격으로 계산한다. 어마어마한 계산을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슈퍼컴퓨터가 필요한 것.
이렇게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예보관은 내일의 일기예보를 최종 결정한다. 수치예보 모델의 데이터는 근거자료일 뿐 최종 판단은 결국 사람의 몫인 것이다.
○ 슈퍼컴의 데이터도 서로 다르면
‘예보관 B 씨는 여러 수치예보 모델이 내놓은 데이터를 받아 들고 고민에 빠졌다. 제각기 다른 데이터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평균값을 취해야 할까, 아니면 어느 특정 모델의 결과를 선별해 사용해야 할까.’
수치예보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기상요소의 변화에 대한 방정식을 다르게 만든 모델 여러 개를 동시에 가동하거나 같은 모델에서 변수의 초기값을 다르게 두고 여러 번 가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앙상블 예보’라고 부른다.
앙상블 예보에서 모든 모델의 결과가 특정 지역의 기상에 대해 비슷하게 나오면 신뢰도가 높아진다. 첨단과학이 다들 같은 결과를 예상하니 예보관도 수긍하게 된다는 얘기다. 문제는 모델들의 예측 결과가 각각 다른 경우. 수치예보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예보관은 최종 일기예보를 결정할 때 이 결과를 크게 반영하지 않게 된다.
결국 정교하고 정확한 수치예보 모델을 도입할수록 예보관이 첨단기술에 근거한 예보를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수치예보 모델의 격자 간격은 예측의 정확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다. 간격이 좁을수록 좁은 지역의 날씨까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현재 기상청이 운영하는 수치예보 모델(RDAPS)의 격자 간격은 30km. 기상청은 미국립대기과학연구소(NCAR)가 개발한 격자 간격 10km의 모델(WRF)도 곧 들여올 예정이다. 기상청 장동언 수치예보 담당관은 “5월부터 WRF 모델을 운영할 예정”이라며 “여름철 집중호우 같은 악(惡)기상 현상을 더 잘 예측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16일 문을 연 이화여대 국지재해기상예측기술센터 박선기 교수는 “우리나라에는 10km 이내의 규모에서 내리는 국지성 호우가 잦다”며 “우리 센터는 미국 오클라호마대와 협력해 격자 간격 1km의 재해기상전용 수치예보 모델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관측 결과 해석 기준 나라마다 달라
‘한국의 예보관 C 씨는 내일 오후 비가 올 거라고 예보했다. 일본의 예보관 D 씨 역시 같은 예보를 했다. 다음 날 두 나라 모두 오전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해 오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의 예보는 틀렸고, 일본의 예보는 맞았다. 왜 그럴까.’
강수량 관측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은 강수량이 0.1mm 이상이면 비가 온 것으로 치지만 일본은 1mm가 넘어야 한다. 오전부터 비가 와 0.1mm를 이미 넘으면 한국에선 오후에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어긋난 것이다. 일본에서는 오후 들어 강수량이 1mm를 넘으면 예보가 맞은 게 된다. 일본에 비해 한국의 기준이 엄격한 셈.
강수량은 관측 데이터를 통해 예보를 판단하는 기준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규정이 없다. 따라서 기후나 지역 특성 등에 따라 나라마다 다르게 정하고 있다.
임소형 동아사이언스 기자 soh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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