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교배 집안 쥐 덕에 사람이 산다?

  • 입력 2008년 1월 4일 03시 01분


《무자년 새해를 맞아 서(鼠)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장인 서행동 씨가 먼저 족보를 펼쳐 보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집안에 드디어 돌연변이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와 누나 사이에서 돌연변이 아들과 딸이 태어났으니 말이다. 이제 이 돌연변이는 아래 세대로 계속해서 전해질 것이다.” 이 무슨 황당한 얘긴가. 남매가 혼인을 하고, 그 사이에서 난 돌연변이를 유전시킨다니. 서씨 집안은 과학자들이 생명과학 실험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가계다. 서행동 씨는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생쥐다. 과학자들은 족보까지 만들어 가며 이런 가계에서 태어난 생쥐의 행동과 유전적 특징, 교배 관계 등을 꼼꼼히 기록해 둔다.》

■ 생명과학의 주연급 조연 생쥐(鼠·서)선생 집안 특별한 족보

○ 유전자 규명 위해 20세대까지 돌연변이 유전

서행동(G3세대) 씨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행동 돌연변이’다. 말을 하면서 연달아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거나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그의 아들과 딸(G4)도 비슷한 행동을 보인다.

이는 안전성평가연구소 송창우 박사팀이 서 씨의 증조할아버지(G0)에게 ENU라는 화학물질을 투여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이 두 세대를 지나면서 축적돼 나타난 것.

송 박사는 “이 생쥐 가계를 통해 ENU가 행동과 관계있는 특정 유전자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유전자가 무엇인지 추적하고 있다”며 “최근 화학물질을 투여해 돌연변이 생쥐를 대량 생산해 유전자의 기능을 알아내는 연구가 활발하다”고 말했다. 송 박사팀은 이 같은 방법으로 지금까지 약 80종의 돌연변이 생쥐를 만들었다.

서 씨 집안의 족보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남매나 부녀간 교배다. 예를 들어 서행동 씨의 아버지(G1)와 어머니(G2)는 부녀지간이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같다는 얘기다.

과학자들이 생쥐를 근친교배 시키는 이유는 일란성 쌍생아처럼 유전자를 같게 만들기 위해서다. 20세대까지 근친교배 시키면 유전자가 99% 이상 동일해진다. 이 같은 생쥐 가계에서는 유전자 구성이 같고 특정 유전자의 변화를 물려받은 자손이 계속 태어나기 때문에 정밀한 실험을 오랫동안 할 수 있다.

○ 염기서열 유사-다산 ‘최적의 실험동물’

특정 질병에 걸리도록 유전자가 조작(형질전환)된 생쥐 집안도 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질환모델연구센터 유대열 박사팀은 간암과 당뇨, 스트레스를 일으킨다고 알려진 유전자들을 생쥐 수정란 속 염색체(유전자를 담고 있는 세포 내 구조물)에 각각 삽입했다.

염색체에 간암 유전자가 끼어 들어간 생쥐는 자라서 간암을 앓게 된다. 이런 생쥐들끼리 근친교배를 하면 대대손손 간암 유전자를 지닌 생쥐가 태어난다. 유 박사팀은 이들을 이용해 간암과 당뇨, 스트레스가 생기는 메커니즘을 밝히고 있다.

외부에서 새로운 유전자가 들어오면 생쥐의 몸은 면역체계를 가동시켜 그 유전자를 이물질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때는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그 유전자의 형질이 사라진다. 새로 도입된 유전자를 이물질로 인식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게 핵심 기술이란 얘기다.

유 박사는 “세계적으로 수만 종에 이르는 형질전환 생쥐가 만들어졌지만 연구에 계속 사용되는 건 수백 종에 불과하다”며 “우리가 개발한 간암모델 생쥐 가계는 1992년부터 지금까지 15년간 유지될 정도로 매우 우수하다”고 설명했다.

안전성평가연구소 한상섭 소장은 “생쥐의 유전자를 구성하는 염기서열은 사람과 80% 정도 유사하다”고 말했다. 인간 질병을 연구하는 모델 동물로 생쥐가 안성맞춤인 이유다. 임신기간(3주)과 수명(2∼3년)이 짧고 한 번에 새끼를 5∼12마리나 낳는다는 것도 실험동물로서 큰 장점이다.

○ 국내서도 연간 300만 마리 이용

사람과 생쥐의 유전자가 구조는 같지만 기능이 다른 경우도 있다. 이런 유전자의 기능을 밝히기 위해 최근 ‘인간화 생쥐’까지 등장했다. 사람 유전자를 직접 생쥐에게 넣어 주는 것.

생쥐가 음식으로 섭취한 영양을 열로 발산하게 하는 유전자(β-3 AR)가 한 예다. 이 유전자의 활동을 증가시키는 약물을 찾아내면 비만치료제로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보약물을 개발한 결과 생쥐에서는 효과를 보였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서는 별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에 과학자들은 생쥐의 β-3 AR를 제거하고 대신 사람의 같은 유전자를 넣어 후보약물에 대한 반응을 조사하고 있다.

실험에 쓰이는 쥐는 세계적으로 연간 약 3000만 마리. 국내에서도 약 300만 마리에 이른다. 과학자들은 사람을 위해 희생된 이들 동물을 위해 해마다 위령제를 지낸다. 또 실험할 때 ‘3R’의 원칙을 따르도록 노력한다. 3R는 동물실험 외에 다른 방법을 찾고(Replace), 실험동물의 수를 줄이며(Reduce), 실험동물의 고통을 완화한다(Refine)는 뜻이다.



임소형 동아사이언스 기자 soh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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