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본능, 우리 안에 있다

  • 입력 2008년 2월 15일 02시 59분


카인의 후예? 이탈리아 화가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의 ‘동생을 살해하는 카인’.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동생 아벨을 죽이는 형 카인을 묘사한 작품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오랫동안 진화해 온 ‘살인본능’을 타고난다고 주장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카인의 후예? 이탈리아 화가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의 ‘동생을 살해하는 카인’.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동생 아벨을 죽이는 형 카인을 묘사한 작품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오랫동안 진화해 온 ‘살인본능’을 타고난다고 주장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안 팔았어요, 죽였어요.”

사라진 출장안마사 여성들을 어떻게 했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지영민(하정우)은 태연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14일 개봉한 영화 ‘추격자’에 등장하는 영민은 잔혹한 연쇄살인마다.

영화의 단골 소재인 살인. 보통 제정신이 아니거나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이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범죄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자들은 평범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살인본능’이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는 지난달 31일자에서 과학자들의 이 같은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 희생자의 경쟁자는 번식에 더 유리

진화론의 관점에서 삶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생존과 번식이다. 온갖 경쟁과 위험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자신의 자손을 많이 남기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히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적응해 왔다.

캐나다 맥마스터대의 마틴 달리, 마고 윌슨 박사팀은 “인간의 살인 행동은 생존이나 번식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부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살아남기 위해 타인과 싸우거나 배우자를 혼내 바람을 피우지 못하게 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폭력을 쓰다 보면 살인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텍사스대 데이비드 버스 박사와 뉴저지 리처드스톡턴대 조슈아 던틀리 박사팀은 이를 ‘살인적응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 속에서 살인이 종종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 됐기 때문에 인간은 이에 적응해 왔다는 얘기다.

살해당한 희생자의 유전자는 후세에 전달되기 어려워진다. 희생자의 배우자는 다른 사람과 교제할 것이고, 자식은 보살핌을 받지 못해 위험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희생자의 경쟁자는 그만큼 생존과 번식에 상대적으로 더 유리해진다.

그렇다고 살인을 하게 만드는 특정 유전자가 있다는 건 아니다. 진화심리학자인 이화여대 전중환 박사는 “폭력 성향이 걷잡을 수 없이 극심해질 경우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심리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다는 것”이라며 “이 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이 진화 과정 동안 자연선택돼 왔다”고 말했다.

영화 ‘추격자’에서 영민은 범행 장소나 증거를 감추는 등 나름대로의 정교한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인다. 버스 박사는 이처럼 현대에 일어나는 많은 살인이 사전에 철저히 계획된다는 점도 살인을 갑작스러운 충동이나 비이성적 행동으로만 여길 수 없는 근거라고 설명한다.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쳐 인간의 마음속에 남은 살인본능이 표출된 거라는 얘기다.

○ 살인 진화심리 연구로 범죄 예방

영국 케임브리지대 마뉴엘 아이스너 박사는 13∼20세기까지 유럽의 공식 문서자료를 토대로 살인율을 조사했다. 그 결과 13, 14세기에는 연간 10만 명당 평균 32명꼴로, 15세기에는 41명꼴로 살인이 일어났다. 그 뒤부터는 세기마다 19명, 11명, 3.2명, 2.6명으로 줄어들었고, 20세기에는 1.4명으로 나타났다.

전통적인 사회과학자들은 이 같은 감소 추세가 살인을 진화로 설명할 수 없는 근거라고 반박한다. 살인이 자연선택된 본능이라면 항상 비슷한 비율로 일어나야 할 거라는 말이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자들은 치안이 좋아지고 의료기술이 발달하며 생활수준이 높아지는 등의 환경 변화가 살인율을 낮추는 요인일 뿐이라고 재반박한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진화해 온 살인의 심리적 메커니즘이 환경조건에 따라 시대나 장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 예를 들어 살인을 부를 정도로 폭력적인 싸움에 대해 강력한 징계를 가하는 법이 생기면 실제 살인이 일어나는 건수는 줄 것이다.

인간에게 살인본능이 있다고 해서 이 범죄가 정당화되진 않는다. 현대 진화심리학은 살인의 심리적 메커니즘이 진화해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 메커니즘이 작동하는지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위험에 미리 대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임소형 동아사이언스 기자 soh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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