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me TOWN]“병원과 환자 사이에 맺힌 한 풀어드려요”

  • 입력 2008년 5월 12일 03시 01분


1999년 부산의 한 병원에서 의료사고가 발생했다. 척추 수술 후 두통을 호소하던 50대 여성이 반신마비가 된 것이다. 병원 측은 환자에게 책임을 미뤘다. 피해 여성과 딸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이듬해 한 변호사에게 변호를 맡겼으나 1심에서 패했다.

2002년 3월 신헌준(39) 의료전문 변호사가 2심을 맡았다. 신 변호사는 환자 측의 승소를 이끌어냈다. 그는 의료에 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당시 진료기록을 꼼꼼히 살펴 감정해 낼 수 있었고, 결국 병원 측의 과실을 입증했다. 이 사건은 신 변호사가 맡은 첫 변호였다.

신 변호사는 “결혼도 하지 않고 오랜 세월 어머니의 병간호를 했던 딸이 1심에서 지고 나서 굉장히 괴로워했다”면서 “재판에서 이긴 뒤 두 모녀가 흘렸던 뜨거운 눈물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신 변호사는 서울 한복판 남대문 인근에 있는 법률사무소 ‘재인’에서 10년차 의료전문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1년 동안 의료소송 60∼70건을 포함해 모두 150건에 이르는 소송을 맡는다.

법률사무소 재인은 지난해 10월 창립했다. 재인의 변호사들은 대부분 30대 후반으로 의료, 금융, 지적재산권 파트로 나눠서 활동하고 있다.

○ 의료전문 변호사 1970년대부터 활동

한국의 1세대 의료전문 변호사들은 1970년대 이후 등장해 1989년까지 활동했다. 병원 측의 과실추정(명확하지 않은 사실을 일단 있는 것으로 정하여 법률효과를 발생시키는 일)을 인정하지 않아 환자 측의 승소율은 낮은 편이었다.

1990∼2003년 매년 의료소송 건수는 15% 이상씩 늘었다. 환자 측에서 먼저 병원 측의 과실이 있음을 밝히면 의사나 병원은 반대로 과실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입증책임이 환자와 의사(병원) 반반씩 나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의료소송은 늘었다.

현재 의료소송을 전문적으로 맡는 변호사들은 3세대인 셈이다. 신헌준 이동필 서상수 변호사 등이 3세대의 대표 주자격이다. 3세대는 의료사고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 2004년부터 현재까지 활동하는 변호사들을 말한다. 3세대로 접어들면서 환자들의 승소율은 과거에 비해 더 높아졌다. 소송 건수만 연간 1200건 가량. 한국소비자원에서 합의나 조정된 것은 소송건수의 5배인 6만여 건에 이른다.

○ 과학적 접근으로 의료사고 진실 밝혀내

신 변호사는 “의료소송은 환자와 그 보호자, 그리고 병원 측이 모두 감정적으로 예민해져 있다”면서 “‘맺힌 한’을 풀어준다는 심정으로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전문 변호사는 보건의료 전반에 걸친 소송과 분쟁에 관여할 뿐 아니라 공정거래, 보험 등도 주요한 업무분야다. 의료전문 변호사는 늘 환자의 편일 수도, 병원의 편일 수도 없다. 해당 의료사고의 진실 규명을 통해 환자 혹은 병원의 과실을 철저히 가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신 변호사는 관상동맥성형술을 받다가 사망한 환자에 얽힌 사건을 맡은 적이 있다. 환자의 보호자 측이 병원을 고소했고, 신 변호사는 병원의 사건 의뢰를 받은 것이다. 관상동맥성형술은 막혀 있는 혈관을 넓히는 수술인데, 환자가 혈전이 생겨 사망했다. 환자 보호자 측은 혈관 속에 가느다란 관을 집어 넣어 혈관을 넓히는 시술 도중 관이 혈관을 손상시켜 환자가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신 변호사는 실처럼 얇은 관이 쉽게 변형된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시술에 사용된 관이 환자의 사망과 무관하다는 걸 밝혀냈다. 과학적 증명으로 병원 측의 승소를 이끌어낸 것이다.

○ 병원의 기업화 대비한 ‘인재 네트워크’ 형성

최근 의료계의 최대 화두는 의료개정법 통과다.

법률안의 주요 골자는 병원의 자율경쟁과 인수합병(M&A)의 합법화, 해외자본 유치 등이다. 의료계 전문가들은 올해 안에 이 법안이 통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재 국내 의료체계는 의료기관의 영리법인화를 금지하는 등 유럽식이다. 하지만 의료개정법이 통과되면 병원의 무한경쟁과 진료비 자유화를 인정하는 미국식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

신 변호사는 “의료개정법이 통과된다는 것은 병원이 기업화, 대형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시대로 접어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면서 “병원 규모가 커지는 만큼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문제도 함께 커져 관련 소송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금융전문 변호사를 고용하는 등 인재 네트워크를 강화해 병원의 경영과 관련된 소송에도 대비하고 있다.

▼ Tip 의료사고가 났을 때 대처법▼

[1] 병원 ‘진료기록’을 즉시 받아내라

진료기록은 병원의 증거인멸을 막기 위해 이른 시간 안에 확보해야 한다. 진료기록으로는 의사 지시서, 치료경과와 간호내용을 기록한 일지 등이 있다. 진료기록 공개를 거부당했을 때에는 “의료법 위반으로 신고하겠다”고 주장하라. 대부분 자료를 내준다.

[2] 의료전문 변호사나 의료 단체, 의료인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라

일반인은 전문 의료지식이 없다. 혼자서 전전긍긍하기보다는 한국소비자원, 의료소비자시민연대 같은 소비자단체나 의료전문 변호사 같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면 진료기록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거나 병원 측의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어 대응책 마련도 훨씬 빠르고 수월해진다.

[3] 의료 사고 경위서를 시간대별로 작성하라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간 이유와 병명, 치료과정 등을 빠짐없이 꼼꼼히 작성해 둬야 한다. 사실관계 파악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치료를 받기 전에 담당 의사에게 의료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좋다.

[4] 의료소송 전에 진실규명이 가능한지 먼저 판단하라

의료사고를 둘러싼 진실규명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면 소송을 준비하고 증거 확보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진료기록부를 검토하고 의사가 환자에 대한 설명 의무를 충실히 지켰는지 등을 확인하면 승소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다.(도움말=신헌준 의료전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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