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의 돛대가 다리에 걸렸다. 말 그대로 부러졌다. 풍향계, 풍속계, 표시등이 모두 부서졌다. 더 이상의 항해는 불가능해졌다.
해양 탐사선 '장보고호'의 선장 권영인(47·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박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10월 9일, 벅찬 설렘을 안고 출항한 지 이제 겨우 21일째. 미국 매릴랜드 주 아나폴리스 항(港)에서 연안운하를 따라 조지아 주 서배너 항으로 막 입성하려던 찰나였다. 분명히 디지털 지도와 해도에 표시된 정보에는 서배너 내항 다리의 높이가 15m로 돼 있어서 12m인 우리 배의 돛대가 다리를 통과하는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사람이 다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그는 부러진 돛대를 보며 밀려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정말 이 요트 하나로 남미를 거쳐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을까. 내가 너무 무모했던가.'
그는 눈을 감고 21일 전, 설레던 첫 출발을 떠올렸다.
●'다윈' 따라 설레는 출항, 그리고 한달
10월 9일 아나폴리스 항의 날씨는 쾌적했다. 권 박사는 어릴 적 꿈을 이룬다는 생각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의 꿈은 영국이 낳은 위대한 과학자, 찰스 다윈이 177년 전 '비글호'를 타고 누볐던 항로를 따라 가보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다윈이 진화론의 영감을 얻었던 역사적인 현장에서 지구온난화에 따른 환경 변화와 해양자원을 연구해보고 싶었다.
내년은 다윈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더 기다리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니던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을 그만두고, 어렵게 요트를 구하고, 첨단 장비를 실었다. 미국 동부에서 중남미~남미연안~갈라파고스 섬~태평양~전남 여수까지 장장 411일 간의 일정을 세웠다.
탐사팀은 달랑 두 명. 팀장인 권 박사와, 대원 강동균(45·개인사업) 씨. 강 씨는 연세대학시절 요트부 후배다. 대학시절 '언젠가 요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싶다'는 꿈을 잊지 않고, 선배의 탐험 소식에 달려온 고마운 후배다.
두 사람은 요트를 타고 체서피크만에서 동부 연안수로(The Intracoastal Waterways·ICW)를 따라 이동했다. 암초에 부딪힐 뻔하고, 엔진도 한 번 고장 났으며 날씨는 좋았다가도 갑자기 악화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21일을 달려왔는데 돛대까지 부러지니 온몸에 힘이 빠질 만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돛대 고정을 위한 강철 와이어는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 강철 와이어가 끊어져 사람을 치면 큰 부상이 날 수 있다.
권 박사는 10월 30일 서배너 항 선더볼트 마리나 요트공장에 배의 수리를 맡겼다. 야외작업을 해야 하는 배의 특성상 날씨가 좋아야 빨리 고칠 수 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와주질 않는 걸까. 날씨가 계속 악화되는 바람에 11월 3일 현재까지도 배는 수리 중이었다.
●유일한 탐사대원, 한국으로 떠나다
이 날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유일한 탐사대원, 강 씨가 떠난 것이다.
강 씨는 탐험을 위해 집을 나오면서 "아는 형 만나러 미국 간다"고만 했단다. 그런데 태평양을 건넌다고 신문(▶본보 10월 11일자 A1·3면 참고)에 대문짝만하게 났으니 한국의 가족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가족의 걱정도 문제지만 강 씨는 서울에 엄연한 직장이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한 달을 함께한 후 나중에 또 합류하기로 했었다.
예상했던 일이라고 해도 권 박사는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제대로 못 먹고, 못 자고 고생하면서도 군소리 없었던 후배를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큰 꿈을 위해서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미국을 벗어나 바하마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곧 본격적으로 탐사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며 힘을 내야 한다.
강 씨의 빈자리를 채워 줄 새 대원에 대한 기대도 크다. 연세대 요트부 훈련부장인 송동윤(20·연세대 경영학과 1학년 휴학 중) 씨가 3일 도착했다. 어리지만 당찬 송 씨를 보며 권 박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현수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