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상도 전자종이도 수년내 상용화 될 듯
복사기, 팩스, 프린터 등 전통적 사무기기에 활용된 기술은 공통적으로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첨단 네트워크 기술과 결합한 기술을 선보이고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에 관련 업계의 고민은 깊어진다.
그러나 일본 도쿄에 위치한 굴지의 사무기기 회사 후지제록스는 기초 과학과 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디지로그’ 기술로 새로운 성장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다. 1960년대 전자 복사기의 등장에 맞먹는 ‘문서 혁명’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 종이에 자기 섬유 몰래 심어 기술유출 방지
후지제록스 본사 연구소는 그동안 철저한 ‘베일’에 가려 있었다. 기업들의 공통된 고민인 첨단 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 비공개 원칙을 고수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의 흔적은 이들의 연구 주제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근 기업들은 첨단 기술을 동원해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기술 유출 사례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휴대전화, 메모리에 몰래 정보를 넣어 유출하는 시도는 첨단 보안기술로 적발할 수 있지만 센서에 걸리지 않는 일반 종이를 들고나갈 경우엔 속수무책이다. 이 회사 연구진은 자성(磁性) 물질을 머리카락 굵기보다 훨씬 작은 수십 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분의 1m)로 잘라 종이에 섞는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자성물질에 발생하는 일종의 ‘잡음’을 읽어 들이는 방식이다. 자성물질에서 일어나는 불규칙한 자기 현상인 ‘바크하우젠 효과’를 이용한 것.
누구라도 자성 섬유가 섞여 있는 문서를 주머니에 넣고 출입문을 지나면 자기 센서가 울리게 된다. 연구팀 소속 드미트리 이부텐 연구원은 “바깥에 서류를 들고나가는 것은 물론 센서를 복사기나 폐기장치에 달면 무단 복사나 폐기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진짜 문서와 위조문서를 구별하는 종이 인식 기술도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종이 표면의 조직을 지문처럼 미리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문서의 진위를 가리는 방식이다.
사람마다 고유한 지문이 있듯 종이마다 표면의 섬유질 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서 착안했다. 연구팀 관계자는 “가로 세로 2mm 정도의 넓이로 99.9% 이상의 진위 판단이 가능하다”고 했다.
○ 전자 종이 시대 성큼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결합한 디지로그 융합기술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다.
지난해 개발된 고해상도 컬러 전자종이가 상품화를 앞두고 있다. 전기신호를 주면 표면에 그림과 글씨가 쓰이는 전자종이는 휘거나 접을 수 있으며 몇 번이고 다시 쓸 수 있어 미래 출판 산업을 획기적으로 바꿀 신개념 매체로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의 제록스사는 1970년대 처음으로 전자종이를 개발해 공개했다.
연구원이 들고 있던 책받침 모양의 플라스틱판을 출력 장치에 넣고 입력 버튼을 누르자 눈 깜짝할 사이에 글자와 그림이 새겨졌다. 해상도는 1200dpi(인치당 찍히는 점의 개수)로 거의 레이저 프린터 수준까지 와 있다.
연구그룹 광학전자기술연구실 야마모토 시게루 박사는 “현재 일반 종이 두께와 같은 200∼300μm로 얇게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와 있다”며 “수년 내 공장 작업장과 사무실에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후지제록스는 2010년 3월 이들 첨단 문서 기술 개발을 담당하는 산하 10개 연구소를 통합해 도쿄 인근의 항구도시 요코하마에 20층짜리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할 예정이다.
도쿄=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