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년 예술가들이 꿈꾸는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설치미술가 이희명 씨는 기후변화 시대에 적응한 새로운 생물종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나날이 올라가는 기온, 급격히 줄어드는 빙하,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진화’를 선택한 바다표범은 현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이종교배와 유전자조작(GM)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생명체에도 주목한다. 사람의 손가락과 결합한 이종 세포, 침팬지의 몸에서 태어난 애벌레는 현대의 생명공학을 통해 더는 상상이 아닌 실현 가능한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 예술가의 상상에 과학적 영감 가세
과학과 예술이 본격적으로 ‘화학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29일부터 내달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2050 퓨처 스코프, 예술가와 과학자의 미래실험실’에서는 예술가의 상상에 과학적 영감이 가미된 이색 작품 30여 점이 소개된다.
기획전에 참가한 예술가들의 상상은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에 KAIST와 광운대, 아주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소속 과학자 9명도 과학적 상상을 더했다. 이들은 40년 후 미래를 ‘지구환경 변화’ ‘뇌 과학 번성’ ‘시공간의 초월’ ‘나노혁명’ 시대로 규정한다.
노진아 작가는 ‘미생물’이라는 작품에서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모호한 10억분의 1m(nm·나노미터) 세계를 그린다. 현미경을 통해 보는 철가루는 흡사 작은 생명체를 떠올리게 한다. 노 작가는 “자기 결합과 분해를 반복하는 작은 무생물의 모습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며 “점점 더 작은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세계관도 바뀔 수 있다는 점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설명한다.
길현 작가의 작품 ‘나노가든’은 과학자들이 합성한 ‘나노 꽃’이나 ‘나노 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요소비료, 설탕을 섞은 물감이 건조되는 과정에서 결정이 생성된다는 특성에 주목했다. 실제로 캔버스에 뿌려진 물감 결정은 시간이 흐르면 계속해서 모습을 바꾼다. 두 작가는 작품의 영감을 나노 분야 전문가인 KAIST 최양규 교수와 박재우 교수에게 얻었다. 최 교수는 작가들과 가진 워크숍 당시 “작품 작업 과정이 실제 실험실에서 나노 소재를 합성하는 공정과 상당히 유사하다”며 비상한 관심을 나타냈다.
○ “작품 작업 과정과 실험실 합성 과정 서로 닮아”
이번 기획전에서는 일반인이 평소 어렵게 느끼는 ‘인지과학’이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 재조명된다. 김정한 작가는 연속된 동작을 담은 여러 장의 필름을 통해 ‘착시’와 ‘잔상 효과’라는 뇌의 인지 작용을 설명한다. 영화 영사기의 원리야말로 뇌의 인식과 작용을 주제로 하는 현대 인지과학을 활용한 최초의 사례라는 것. 연세대 의대에서 의학 일러스트를 그리는 장동수 작가는 해부학 실습에서 사용되는 시신에서 견본을 뜬 머리 단면들을 통해 뇌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위트 있게 표현했다.
과학과 공학을 전공한 작가들의 활약도 눈에 띈다. 오창근 작가와 함께 ‘시공간 초월의 시대’를 주제로 작품을 선보인 서경진 작가의 경우 미디어 공학을 전공한 이공계 출신. 작품에 사용된 컴퓨터 프로그램을 손수 짜는 등 예술과 과학의 경계 허물기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이번 기획전은 예술가와 과학자의 1년에 걸친 협업으로 준비됐다. 4차례에 걸친 워크숍 과정에서 작가들은 과학자의 지식과 영감을 빌려 작품을 재해석하고 과학자는 예술과 과학의 공통분모를 발견했다. 전시를 기획한 우선미 사비나미술관 큐레이터는 “공동 작업에서 과학적 개념과 예술가의 상상력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며 “미래 사회의 원동력으로 예술과 과학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례”라고 말했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