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손 데이터 쓴 논문 논란 우려
업그레이드 부족해 잦은 고장
정부 운영비마저 끊겨 한숨만
“뇌의 전두엽 영상을 찍었는데 노이즈가 너무 심해 쓸 수가 없었어요. 솔직히 이젠 데이터를 믿을 수가 없네요.”
최근 KAIST에 있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촬영 장비를 써서 실험한 서울대 심리학과 이상훈 교수는 이처럼 실망감을 털어놨다.
뇌 내부의 생리활동을 촬영하는 fMRI는 뇌과학 분야의 핵심 장비다. 특히 KAIST의 fMRI는 누구나 저렴하게 쓸 수 있어 사실상 국내 뇌 연구를 이끌어왔다. 그랬던 이 장비가 최근 연구자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1998년 뇌연구촉진법을 제정하며 야심 차게 이 장비를 구입한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 핵심 영상 왜곡되는 첨단장비
이마 바로 뒷부분인 전두엽은 기억력과 사고력 등 고등 정신기능을 수행하는 뇌의 핵심 영역이다. 이곳을 찍은 영상에 문제가 있다는 건 뇌 연구 장비의 치명적 결함이다.
KAIST의 fMRI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학계에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고 많은 뇌 연구자가 지적한다. 올 1월 KAIST의 fMRI로 뇌 영상을 촬영한 전남대 심리학과 박태진 교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측두엽 영상도 왜곡돼 나와요. 청각정보처리나 얼굴 인식에 중요한 기능을 하는 영역이죠. 안 되겠다 싶어 fMRI를 보유한 국내 대학병원을 찾아 다시 찍었습니다.”
사실 fMRI가 KAIST에만 있는 건 아니다. 대학병원 등 웬만한 규모의 병원은 대부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박 교수는 “KAIST에서 6∼8명 촬영하는 비용으로 병원에선 1명밖에 못 찍는다”며 “환자가 없는 주말이나 밤 시간을 이용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돈 되는 환자를 놔두고 굳이 연구용으로 많은 시간을 개방할 리 없으므로 연구전용으로는 KAIST의 fMRI가 거의 유일한 셈이다.
급기야 일부 국내 뇌 연구자는 외국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고려대 심리학과 김학진 교수는 올 2월 일본 다마가와대에서 fMRI를 빌려 썼다.
“코 바로 위에 있는 내측 안와전두엽 영역은 KAIST 장비론 영상이 제대로 찍히지 않아요. 의사결정을 다루는 제 연구에 치명적이죠. 일본에선 다행히 깨끗한 영상을 얻었습니다.”
뇌 연구자들은 KAIST에서 fMRI를 처음 써보는 초보 연구자가 만약 훼손된 데이터 그대로 국제학술지나 학회에 논문을 발표하면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 구입만 하고 운영은 뒷전
KAIST에 연구전용 fMRI가 처음 설치된 건 2001년. 그동안 국내 뇌 연구 영역을 의학뿐 아니라 생물학이나 심리학, 물리학 등 여러 분야로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 장비를 관리하고 있는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박현욱 교수는 “10년이 다 됐지만 업그레이드가 부족해 성능이 설치 초기 수준에 머물러 있는 데다 1년에 두세 번은 고장 난다”며 “나름대로 기술을 보완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장비 유지나 업그레이드, 수리 등에 필요한 운영비다. 한 해에 약 3억 원 규모다. 장비의 핵심 부품인 초전도자석을 운영하려면 온도를 낮추기 위해 액체헬륨이 필요하다. 액체헬륨은 사용할수록 공기 중으로 날아가 없어지기 때문에 제때 채워줘야 한다. 액체헬륨 보충에만 1년에 약 3000만 원이 든다. 박 교수는 “지난해 4월부터 정부에서 지원하는 운영비가 끊어져 다른 연구비에서 그때그때 충당하고 있다”며 “이런 방식으론 장비를 지금 수준으로라도 계속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우려했다.
KAIST에 fMRI를 납품한 국내 기업 ‘아이솔테크놀로지’ 이흥규 대표는 “현재 KAIST fMRI의 하드웨어는 영상처리 시간이나 해상도, 데이터 수집 성능 등이 7, 8년 전 수준”이라며 “핵심부품인 스펙트로미터만 교체해도 영상처리 시간이 4분의 1 정도로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랏돈으로 구입한 고가의 과학장비가 부실한 사후관리 때문에 무용지물이 될지 모른다는 지적이 과학계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다.
fMRI(기능성 자기공명영상)
뇌가 활동하는 동안 소모되는 산소의 양을 측정해 영상으로 나타내는 장비. 개인별 건강 상태나 기분, 처리할 정보의 종류 등에 따라 뇌 영역마다 산소 소모량이 다르기 때문에 의학이나 심리학, 전자공학 등의 분야에서 뇌질환을 진단하거나 개인별, 뇌 영역별 생리기능을 연구하는 데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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