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어투까지 낱낱이…“보이스피싱, 꼼짝마!”

  • 입력 2009년 4월 24일 03시 02분


대검 ‘디지털포렌식센터’ 범죄 분석현장 직접 가보니…

연쇄살인범 강호순에게 22일 1심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강호순은 붙잡히지 않기 위해 폐쇄회로(CC)TV가 설치된 도로를 교묘히 피해 다녔지만 한 학교 현관에 설치된 CCTV에 찍히며 결정적인 단서를 남기고 말았다.

2005년 사형을 선고받은 연쇄살인범 유영철도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흉기와 현장을 여러 번 씻었다. 하지만 노련한 과학수사관들은 유영철의 망치를 분해해 안쪽 이음쇠에서 피해자의 유전자(DNA)를 발견했다. 미국드라마 ‘CSI 과학수사대’ 못지않게 범죄를 과학으로 해결하는 대검찰청 ‘디지털포렌식센터(DFC)’를 기자가 직접 찾아가 봤다.

○ 흐린 사진도 또렷하게

영상 증거를 분석하는 DFC 영상분석실은 5분이 멀다하고 전화벨이 울렸다. CCTV에 찍힌 범인의 얼굴과 용의자가 같은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묻는 담당 검사의 전화였다. 최근 CCTV로 찍은 사진은 유력한 증거로 자주 활용된다.

문제는 사진의 질이 크게 떨어지는 경우. 강호순처럼 길을 지나다 건물 내부의 CCTV에 우연히 찍힌 영상으론 대개 정확한 얼굴을 알기 어렵다. CCTV는 대부분 60만 화소를 넘지 않아 화질이 낮은 데다 화면을 확대하면 얼굴이 뭉개지기 때문이다. 이때 사용하는 영상분석법이 ‘슈퍼 레졸루션’이다. 화질이 낮은 사진을 뭉개지 않고 확대하는 기술이다.

김동민 실장이 살인사건 현장 주변에서 구한 CCTV 영상을 가져왔다. 어느 건물 2층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1층 금은방 CCTV에 밖을 지나가던 사람이 찍혔다. 워낙 작게 찍히고 화질도 좋지 않아 아무리 확대해도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김 실장이 영상분석 프로그램으로 동영상 파일을 열자 CCTV가 프레임별로 찍은 사진이 순서대로 늘어섰다. 여러 장을 겹쳐 놓자 얼굴이 점점 또렷해졌다. 용의자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김 실장은 “1초에 12프레임 이상 촬영한 CCTV 영상만 가능한 기술”이라며 “영화처럼 저화질이나 저속으로 촬영된 영상을 무한정 확대할 순 없다”고 설명했다.

○ ‘은’ ‘의’ 차이가 유무죄 갈라

음성증거를 분석하는 연구실은 조용했다. 소리를 귀가 아닌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유괴범과의 통화에서 지하철이나 비행기 소리를 듣고 범죄 장소를 찾는 음성분석 수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기술이 결정적 증거를 내놓는 사건은 명예훼손이나 뇌물수수, 사기사건이다. 최근에는 사기사건 중 ‘보이스피싱’이 많이 늘었다. 음석분석실은 먼저 용의자가 사용한 단어나 어투를 분석해 수사 방향을 잡도록 돕는다.

김경화 음성감정관은 최근 명예훼손죄로 고발된 용의자의 무죄를 밝혔다. 증거로 제시된 녹음 파일에 ‘∼비자금을 은닉해’라는 내용이 있었다. 비자금 앞부분이 ‘○○은’인지 아니면 ‘○○의’인지에 따라 유무죄가 가려지는 상황이었다. 김 감정관은 먼저 잡음을 거른 뒤 ‘ㄴ’음이 있는지 조사했다. 같은 목소리로 녹음된 여러 ‘ㄴ’음을 비교했고 결국 비자금 앞부분에서 ‘ㄴ’음을 찾아냈다. 사건은 무죄가 됐다.

○ DNA는 가장 확실한 증거

유전자감식실은 이날도 문서감정실과 함께 사기도박에 사용된 ‘목카드’와 콘택트렌즈를 분석하고 있었다. 목카드는 트럼프나 화투 뒷면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잉크로 기호나 숫자를 적은 것이다. 특수 콘택트렌즈를 낀 사람만 볼 수 있다. 감식실의 박수정 박사는 콘택트렌즈에 남겨진 사람의 체액에서 DNA를 추출해 분석했다. 이를 통해 누가 콘택트렌즈를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최근에는 마약감식실에서 전달된 주사기의 혈흔을 분석해 용의자 외에 마약을 투여한 두 명을 더 검거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혈흔에서는 용의자와 용의자의 애인, 다른 여성의 DNA가 검출됐다.

증거품에서 DNA를 추출하는 실험실에 들어갈 때는 옷이나 신발에 붙은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공기 커튼’이 설치된 방을 거쳐야 한다. 박 박사는 “유전자감식실은 누구도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없다”며 “2중 3중의 안전장치를 위해 모든 DFC 직원의 DNA 샘플을 보관 중”이라고 귀띔했다.

서범정 대검찰청 과학수사기획관은 “부끄러운 얘기지만 국내에는 아직도 해결 안 된 미제 사건이 많다”며 “증거물에서 발견된 DNA나 음성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용의자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동혁 동아사이언스 기자 jer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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