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선택, 환자 결정이 가장 우선돼야”

  • 입력 2009년 5월 22일 02시 56분


세브란스병원 ‘존엄사 가이드라인’ 발표 21일 존엄사를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연세의료원 박창일 원장(왼쪽에서 네 번째)이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김모 씨의 연명치료 중단 여부는 병원윤리위원회의 의견을 수렴해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김재명 기자
세브란스병원 ‘존엄사 가이드라인’ 발표 21일 존엄사를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연세의료원 박창일 원장(왼쪽에서 네 번째)이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김모 씨의 연명치료 중단 여부는 병원윤리위원회의 의견을 수렴해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김재명 기자
존엄사 기준 맞으면 소송없이 치료중단 가능
허용범위는 엄격 제한 유사상황서 분쟁 소지
존엄사法 제정 시급 의료계선 대체로 환영

대법원의 ‘존엄사 인정’ 판결은 국내 환자에게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인정한 첫 판례로 역사에 남게 됐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존엄사 허용의 요건을 제시하고 있지만 다소 추상적이다. 따라서 앞으로 존엄사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입법이 이뤄져야만 존엄사를 악용하는 사례나 이를 둘러싼 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가족이나 주변서 존엄사 남용 못하게

이번 소송은 지난해 2월 18일 김모 씨(77·여)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폐 조직검사를 받던 중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면서 시작됐다. 김 씨 가족은 병원 측의 의료 과실을 주장하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 병원 측이 거부하면서 소송에 이르게 된 것. 지난해 11월 28일 1심에서 처음으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진 후 약 5개월 만에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온 것이다.

대법원 전원재판부는 존엄사를 인정할 수 있는 환자의 상태를 원심보다 비교적 명확히 제시했다. △환자의 의식이 회복 가능성이 없고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생체 기능이 회복될 수 없으며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한 경우 환자가 사망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명시한 것.

대법원은 특히 존엄사의 의사는 무엇보다 환자 개인의 결정이 가장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족이나 주변에서 환자의 뜻과 상관없이 존엄사를 남용할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재판부는 “환자가 사전 의료지시서 등의 방법으로 미리 의사를 밝히면 이를 존엄사 결정에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다면 평소 가족 친구 등에게 말한 내용, 타인의 치료를 보고 환자가 보인 반응, 환자의 나이, 고통을 겪을 가능성 등 객관적 사정을 종합해 의학적으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은 경우 존엄사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인정되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또 이 같은 존엄사 허용 기준이 충족되면 소송 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지만 회복이 불가능한 사망 단계인지는 전문의사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판단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다만 주심인 김능환 대법관을 비롯해 안대희, 양창수, 이홍훈 대법관은 환자 상태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라고 판단하기 어렵고, 환자가 현 시점에서 연명치료 중단을 바라고 있는지 추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등의 반대 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이날 존엄사에 대한 국민의 큰 관심을 감안해 이례적으로 대법정 선고 장면의 TV 생중계를 허락했다.



○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다 사망 年10만 명 추정

이번 대법원 판결은 그동안 병원에서 말기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국한됐던 연명치료 중단 환자 범위를 식물인간까지 넓히는 상황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최근 서울대병원은 말기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심폐소생술 및 연명치료 여부에 대한 사전 의료지시서’를 받고 있다. 또 상당수 대학병원은 현재 주로 말기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원할 경우 심폐소생술 등 생명연장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소생술 거부(Do Not Resuscitate·DNR) 서약’을 통해 생명연장 치료를 하지 않고 있다.

윤영호 국립암센터 기획조정실장은 “앞으로 유사한 상황의 환자와 가족 간 갈등 때문에 병원과 환자 측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의료계와 법조계에서 논의를 통한 존엄사 관련 법률이나 지침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좌훈정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의료계에서는 이번 판결을 대체로 환영한다”면서도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개략적 내용만 법원이 판단한 것이므로 이후 연명치료 중단의 허용 범위, 대리인의 허용 범위, 의사의 독자적인 결정을 통할 것인지 등에 대한 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다가 사망하는 말기 암 또는 뇌사 환자가 연간 최소 1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어 명확한 존엄사 가이드라인이 정해지지 않으면 이와 유사한 소송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 세브란스병원, 3단계 가이드라인

이번 소송에서 최종 패소한 세브란스병원은 이날 3단계로 나눈 존엄사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가장 심각한 1단계는 회생이 불가능한 사망 임박 단계. 뇌사 환자이거나 여러 부위의 장기가 손상된 환자가 해당된다. 자기 결정을 내릴 수 없더라도 가족 동의와 병원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2단계는 인공호흡이 필요한 지속적인 식물인간 상태로, 심각한 뇌 손상으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으며 주 질환의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다. 이번 대법원 판례가 된 김 씨가 2단계에 속한다. 이 경우에는 자기결정권의 행사가 필요하고 치료 중단 시 가족의 동의와 병원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3단계는 지속적인 식물상태이긴 하지만 자발적으로 호흡할 수 있는 환자다. 이 경우는 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적, 법률적 합의가 이뤄진 후에야 연명치료 중단을 고려할 수 있다. 1, 2단계인 환자는 자기결정권, 가족 동의, 병원윤리위원회 심의 조건을 충족하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지만 3단계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남윤서 기자 bar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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