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해도 고통만 더할뿐… 죽음만큼은 편안히 맞고 싶다”

  • 입력 2009년 5월 22일 02시 56분


서울대병원 2명 ‘존엄사’ 서명… 그들은 왜
“아내와 딸이 눈에 밟혀 꼭 살아야 하는데 몇달이나 살 수 있을지…
하고싶은 것 많았는데 줄이고 줄이다보니 딱 하나 남는 그것은 용서더군요”

서울대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던 말기 위암 환자 A 씨(50)는 22일 편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성가복지병원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기로 했다. 암이 이미 장에까지 번져 수술도 항암치료도 소용없었다. 그는 20여 일 전 항암치료 거부 의사를 밝혔다. “내가 만약 의식을 잃으면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라”는 뜻을 병원 측에 전달했다. 그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호스피스 병원 입원 동의서를 작성할 계획이다.

A 씨는 움푹 꺼진 눈과 살집 하나 없는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다. 그는 “항암치료를 받는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며 “그래도 좋아지지 않는데 어쩌겠냐. 버티는 고통이 더 클 것 같아 (항암치료를) 그만 받겠다고 했다”고 했다. 음식을 삼켜야 기운이 나는데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앉아 있을 기운도 없었다. 입맛은 썼다. 항암치료를 받으면 다 낫는 줄 알았는데 확률은 반반이라고 했다. 이왕 죽을 바에야 고생 덜 하고 편하게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후회도 없지 않다. “내가 사람이 바보 같았다. 하루 소주 한 병씩 마셨다. 저녁마다. 속이 쓰렸지만 술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러다가….”

그래도 이제 불과 오십. 존엄사로 가는 길을 택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내와 어린 딸(18)이 눈에 밟혔다. 그는 “남겨질 식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딸한테 미안하고 아내에게 미안하고 내가 8남매 중 장남인데 장남이 할 일을 동생한테 물려줘야 하니 미안하다”고 말했다. 부인과 딸 이야기를 하는 그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그는 “내가 죄가 큰가 봐요”라고 말했다. ‘모난 동생’이 하나 있어 많이 다투기도 했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그래도 형제니까 그랬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한테 “다 잊자”고 했다. 자기가 먼저 풀고 가겠다고.

그는 의사에게 앞으로 몇 개월 더 살 수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알아봐야 쓸데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살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은 ‘용서’라고 했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줄이고 줄이다 보니 딱 하나만 남더라”며 “다 깨끗이 용서하고 가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존엄성과 용서, 그의 결정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대법원의 존엄사 판결이 내려진 21일, 서울대병원 호스피스 담당자를 찾는 암 환자가 한 명 더 있었다.

B 씨(65·여)는 복막암으로 6년 동안 암 투병을 했다. 수술도 다섯 번이나 했다. 그런데 올 초 다시 암이 재발해 수술을 받았다. 마지막 수술을 받은 지 2개월 정도 지났다.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항암치료도 효과가 없다. B 씨는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다”며 “존엄사를 택할지를 네 딸과 의논해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암 환자 2명은 ‘연명치료를 중단하겠다’고 사전의료지시서에 서명했다. 사전의료지시서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 혈액투석 등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적극적 치료를 받을 것인지 말기 암 환자 본인의 선택을 명시하도록 돼 있다. 서명은 공식적으로 존엄사 의사를 표시하는 행위다.

3여 년간 두경부암과 사투를 벌이며 서울대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오던 C 씨(76). 그는 두경부암 진단을 받은 후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암세포가 독한 항암치료에 반응을 보이며 어느 정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물러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식도까지 번지기 시작했고 더는 약물에도 반응하지 않는 악성으로 변해갔다.

C 씨는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도 “부작용이 심한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해 온 그였다. 자신의 병이 어떻게 진행돼 가고 있는지도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다. 그는 “무리하게 치료를 받느니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서울대병원이 말기 암환자 연명치료 여부에 대한 사전의료지시서를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서울대병원에 근무하는 아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주치의인 허대석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C 씨는 효과도 거의 없는 치료를 계속 받기보다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를 찬찬히 고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왔다”고 말했다. C 씨는 여생을 집에서 보내며 죽음을 맞이할 계획이다.

D 씨(85·여)는 수년 전 림프종 치료를 받고 나은 듯싶었는데 최근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는 병마가 여전히 떠나지 않은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백혈병에 대한 항암치료는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병원 측에 전달하고 20일 사전의료지시서에 서명했다. 치료해도 희망이 없고 오히려 부작용 때문에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소송가족 “미련은 남지만 인공호흡기 떼달라”

병원측 “고귀한 인간생명 회복 최선”… 종교계 일각 “생명경시 우려”

대법원이 21일 식물인간 상태인 김모 씨에게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확정 판결을 선고하자 가족들은 병원 측에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김 씨 가족들은 이날 오후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병원이 연명치료를 중단해 주지 않아 할머니와 우리가 오랫동안 고통받은 것이 유감스럽다”며 “이번 판결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바람을 나타낸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또 “이번 판결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환자들이 고통받는 것을 막을 근거를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가족들은 “할머니가 온전히 살아계신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호흡기를 제거하면) 생전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다는 데 강한 미련이 남는다”며 “이번 소송은 치료 방법의 선택에 대한 소송이지, 죽고자 하는 적극적 권리를 요구하는 소송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김 씨 가족의 소송대리를 맡은 신현호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환자가 치료 방법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측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온 직후 “김 씨에 대한 연명치료 중단은 판결문이 접수된 후 가족과 병원 윤리위원회 의견을 수렴해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박창일 원장은 “연명치료 중단을 살인방조죄로 처벌한 대법원 판례가 있기 때문에 1, 2심 패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의 결정을 듣고자 했다”며 “대법원 판결은 많은 고민 끝에 내려진 판단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 원장은 “고귀한 인간 생명 회복과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한 의료진의 숭고한 정신이 왜곡되거나 폄하돼서는 안 된다”며 “대법원 판결에서 제시된 가이드라인을 기준으로 사회적 합의를 모으는 과정을 거쳐 존엄사에 대한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종교계 일각에서는 생명 경시 풍조가 일 것을 우려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생명윤리위원회는 “이번 판결이 자칫 인간 죽음의 시점을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가져올 수 있다”며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인간 생명 경시를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를 가져올 수 있어 우려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개별 사례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라는 점에서 존엄사에 관한 견해를 밝히지 않기로 했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존엄사 치료중단으로 자연스러운 사망
안락사 인위적인 방법으로 죽음 앞당겨

존엄사(尊嚴死)는 질병으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단계에 접어든 사람이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존엄사는 환자의 신체 상태가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것이 명백한 경우에만 허용되며, 치료 중단이 곧 생명의 단축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락사와는 다르다. 안락사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엄사와 안락사는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측면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존엄사는 환자가 자신의 질병으로 자연스럽게 사망하는 것인 반면 안락사는 환자가 걸린 질병이 아무리 치명적이라도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질병이 아닌 독극물 투여 같은 인위적인 행위가 된다.

대법원이 21일 연명치료 중단을 인정한 김모 씨의 경우는 존엄사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김 씨의 신체 상태를 감정한 의사들이 김 씨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회복될 가능성이 희박하며 스스로 숨을 쉴 수 없어 인공호흡기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는 상태라는 점을 인정하고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판정했기 때문이다.

종교계나 세계보건기구(WHO)도 죽음이 임박한 말기 환자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무의미한 치료’를 받지 않는 대신 훈련된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 등의 도움을 통해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도록 도와주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제도를 안락사 예방 대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김 씨의 경우는 이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반면 김 씨의 사례가 환자나 가족의 요청으로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 공급, 약물 투여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김 씨가 비록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법원의 결정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면 결과적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한편 ‘사전의사결정제도’는 죽음이 임박했을 경우에 생명연장치료를 시행할지에 대한 결정을 미리 개인의 의지와 선호에 따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뇌사’는 뇌의 활동이 정지돼 모든 반사작용이 없는 상태, ‘식물인간’은 심장과 폐 기능이 작동을 멈춰 심한 저산소성 뇌손상을 받은 환자들이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지속적으로 생존하는 경우를 말한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동아일보 김재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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