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로 개발 못하면 태평양 바닷물에 빠져 죽자고 연구원들과 결의했어요. 당시 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원자로 개발에 매달렸지요.”
한국 원자력계의 대부인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77)은 6일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1980년대 초반 한국형 표준 원자로(경수로·KSMP) 개발에 도전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전 소장은 퇴임한 뒤 현재 중국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1982년 국방연구소에서 원자력연구소 부소장으로 부임했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소장으로 재직하며 한국형 원자로 개발, 핵연료 국산화 등을 이끌며 원자력 국산화의 기틀을 다졌다. 원자력계에서는 그가 없었다면 원자력 자립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한 전 소장은 “최근 원자력발전소 수출에 성공하면서 국민의 큰 성원을 받고 있지만 예전에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한 전 소장이 연구소에 처음 왔을 때는 정권이 바뀌면서 연구소가 사실상 해체 분위기였다. 그는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고 떠나려고 하는 연구원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원자력연구소는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마저 바뀌었다.
한 전 소장은 한국형 원자로 개발과 핵연료 국산화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연구소를 다시 일으켰다. 당시 한국형 원자로 개발은 꿈도 꾸지 못했던 프로젝트였다. 한 전 소장은 “산업계는 물론이고 연구소 내부에서도 반대가 너무 심해 포기하려고 했다”면서도 “이런 프로젝트는 돈이 아니라 정신력으로 한다는 걸 깨닫고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1986년 미국 컴버스천엔지니어링사와 공동으로 원자로를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기술자들을 미국으로 보냈다. “그 사람들은 외딴섬 같은 곳에서 정말 고생했어요. 밤새워 연구해야 하는데 미국에선 그게 안 되니까 담을 넘어 다시 연구실로 들어가곤 했지요.”
더 힘들었던 시련은 국내에서 왔다. “한쪽에서는 외국 기술로 만든 짜깁기 기술이라고 비난했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일단 배워서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눈물 흘리며 배운 덕분에 이번에 수출까지 하게 됐잖아요.” 그는 1980년대 후반에는 ‘전기가 남아도는데 정치자금 내려고 대형 연구를 한다’는 비난을 받으며 감사도 받았다고 털어놨다. 지금 분위기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한 전 소장은 서경수, 김병구, 이병령, 김시환, 임창생, 김동수 박사 등을 언급하며 당시 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의 혼신을 바친 노력이 원전 첫 수출의 씨앗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들이 만든 한국형 원자로는 영광 원전 3, 4호기에 처음 적용됐고 이후 한전에서 이번에 수출된 모델(APR1400)로 발전했다.
“나도 살아서 원전을 수출하는 날을 볼 거라곤 기대 못했어요. 기초 연구 없는 원전은 사상누각입니다. 앞으로 더 많이 수출하려면 더 많은 기초기술을 연구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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