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시험 등록, 서울 작년 3위
제약사는 한국의사 모시기 경쟁
환자들은 희망찾아 한국행 러시
다국적 제약회사인 화이자제약은 최근 한국 지사에서 근무하던 의사 출신 이상윤 부장(37)과 박요섭 부장(36)을 미국 본사로 불러들였다. 화이자가 한국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는 약은 총 100개가 넘는다. 이 중 항암제 등 주요 신약의 임상실험을 책임졌던 이들이 수년간 쌓은 노하우를 미국에서도 적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서울, 아시아 임상시험도시 1위로
이 부장은 신장암 표적치료제인 ‘수텐’을 개발한 데 이어 최근 폐암 표적치료제 3상 임상시험도 진행했다. 이 부장은 한국과 미국 본사, 유럽 지사를 오가며 화이자제약의 연구개발 방향을 잡는 역할을 맡는다.
박 부장이 참여한 알츠하이머 신약은 아직 2상 임상시험 단계이기는 하지만, 치매의 근본원인인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을 없애준다는 점 때문에 의료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기존 약들은 치매 진행을 늦추는 역할만 했다. 박 부장은 미국 코네티컷 주 그로턴 시에 있는 화이자 연구개발(R&D)센터에서 뇌중풍(뇌졸중)과 알츠하이머를 연구할 예정이다. 이처럼 한국 임상 의사들이 다국적 제약회사에 특급 대우를 받는 것은 한국의 임상시험 수준이 놀랄 만큼 높아졌기 때문.
그동안 다국적 제약사들이 자체적으로 매기는 임상시험 그룹 범위에서 한국은 중국 인도와 더불어 ‘신흥국(emerging market)’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한국을 이제 일본 호주 그룹에 넣는다. 임상시험 축적기술이나 의료진 수준이 선진국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한 것. 보건복지부 산하 국가임상시험사업단에 따르면 서울은 지난해 임상시험 등록건수에서 미국 휴스턴, 샌안토니오에 이어 세계 3위를 차지했다. 2006년 25위, 2007년 13위, 2008년 19위에서 껑충 뛰어올랐다.
박 부장은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세계 알츠하이머 연구발표회에서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당시 연단에 선 다국적 제약사의 미국인 임원이 영어로 인사말을 끝낸 뒤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어요. 영어 알파벳으로 한국어 발음을 소리 나는 대로 메모한 종이였어요. 그는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한국 전문가들이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회사에서 연구 중인 알츠하이머 약에 한국 연구자들도 많이 참여해 주세요’라고 10분간 한국말 연설을 하더라고요.”
그 임원은 자리에 참석한 한국 의사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한국말을 연습한 것이다.
○ 희망 찾아 한국행 택한 일본 환자들
“임상시험에 대해 실험용 모르모트처럼 사람을 다룬다고 하는 인식을 극복하는 게 제일 어렵지요.”
박 부장은 임상시험을 현재의 약으로 치료가 안돼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이 부장은 “한국에서 임상시험을 하면 일본인 환자들이 자비로 한 달에 한 번씩 비행기를 타고 찾아온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허가받은 약이 듣지 않아 최후의 희망을 찾아 한국을 찾는 것. 신장암 표적치료제를 받고 싶다며 일본인 15명이 등록했다. 당시 한국인 임상시험 참가자수는 34명이었다.
최근 실시한 폐암 표적치료제 임상시험 참여자 중 50%가 일본인 폐암환자였다. 1년이 넘는 기간 중 매달 비행기를 타고, 자비로 체류비용을 해결했다. 일본정부의 임상시험 허가기준은 엄격하다. 이 부장은 “대다수 환자들은 기존 치료제가 듣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신약을 하루라도 빨리 접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임상시험을 한 국가에는 신약 출시가 빠르다. 다른 국가보다 평균 6개월∼1년 정도 먼저 나올 수 있다. ‘수텐’의 경우, 미국과 동시발매됐다.
선진국보다 느슨한 한국법 때문에, 한국에서 임상시험하는 비용이 저렴해서 제약사들이 앞 다투어 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이 부장은 “싸게 하려면 인도 등으로 갔어야 했다”고 말했다. 신경계 치료제나 항암제는 의료체계가 안 갖춰졌거나 일선 병원 의사들이 데이터를 분석할 능력이 없으면 임상시험을 해낼 수 없다. 이 부장은 “신약 임상시험을 하는 동안 결과가 좋건, 나쁘건 수많은 논문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 과정에서 제약사뿐 아니라 병원 의사들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의사=개업해 진료 본다’는 공식 깨야”
이 부장은 서울대 의대를 나와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에서 일했다. 신약에 대한 갈증이 컸던 그는 대학보다 제약회사가 임상시험 기회를 많이 줄 것 같아 자리를 옮겼다. 이 부장은 “우리나라 의대생, 약대생, 생물학 전공자가 해야 될 일이 무궁무진하다”며 “의사=진료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다양한 길을 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부장은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한 뒤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활동했다. 인턴 당시 컨설팅회사에서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다 ‘의료도 비즈니스가 접목되면 더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고, 뒷날 한국화이자제약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어학연수나 유학 경험이 없다. 1시간씩 외국인들 앞에서 발표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둘은 “발음은 별로지만 알맹이는 자신 있다”고 말했다. 이 부장이 덧붙였다. “한국에서 좋은 임상시험을 하면 외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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