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진료실을 들어선 부부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남편은 “선생님, 제 딸이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인답니다”라며 “집사람 눈을 닮은 것 같아요”라고 덧붙인다.
부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딸이 안경을 쓸지 모른다는 사실에 남편은 속이 상했다. 하필이면 엄마의 눈을 닮았을까? 나는 모른 체하며 “그렇군요. 따님 눈이 엄마를 닮아 참 예쁩니다”라고 말했다. 검사를 해 보니 평범한 근시였으며, 사시나 약시는 없었다.
1927년 미국 안과 의사인 맥클린도 비슷한 관찰을 했다. 안경을 쓴 자녀의 부모 중 상당수가 안경을 썼다는 것이다. 그는 근시가 유전일지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엔 과학적 검증을 하지 못했다.
15년 후 미국 안과의사 플래크가 부모와 자녀 모두 고도근시가 있는 가족을 발견하면서 맥클린의 가설이 재조명됐다. 이후 안과의사 프란세셰티(스위스)와 프랑수아(프랑스)는 가족 4대에 걸쳐 고도근시인 경우를 10건이나 발견했다.
1992년부터 근시 유전자를 규명하려는 연구가 진행돼 고도근시를 유발하는 유전자 5개와 약간의 근시를 유발하는 유전자 5개가 밝혀졌다. 부모 둘 다 근시인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6배 정도 근시 자녀가 많다. 그러나 근시의 유전 방식이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뇌기능 전문가 칼슨은 근시 유전자가 뇌를 발달시키는 염색체 영역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근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실제로 근시가 있는 18세 학생 그룹이 근시가 없는 그룹보다 지능지수가 높았고, 10년 전 두 그룹이 모두 근시가 아니었을 때도 지능지수에서 차이가 났다는 것을 확인했다. 3년 후 미국 유전학자 콘(Cohn)도 성적 최상위 그룹이 하위 그룹과 비교하여 근시가 많다는 사실을 학계에 보고했다. 이 후 많은 연구가 근시 유전자가 뇌 발달에 관여한다는 증거를 발표했다.
딸의 근시를 설명하면서 공부할 때는 예쁜 안경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물었다.
“혹시 근시의 장점을 아십니까?”
“글쎄요. 40대에도 돋보기 없이 책을 볼 수 있다는 것 말고는 다 불편할 것 같은데요.”
“그뿐만은 아니지요. 근시가 있는 사람들은 눈이 커서 대부분 예쁩니다. 특히 동양인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고요. 또 근시 유전자가 있으면 수재가 될 잠재력이 있습니다. 따님이 엄마로부터 근시 유전자를 받았다면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셔야 합니다.”
물론 근시가 심해지면 망막박리나 녹내장의 위험이 조금 높으므로 정기검진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선생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가 눈이 좋다 보니 근시의 단점만을 보았군요. 사실 딸이 작은 제 눈이 아니라 엄마 눈을 닮아서 다행입니다.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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