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나러 서울 강남의 한 술집을 찾았다.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주변에는 온통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뿐. 친구가 약속보다 늦게 도착했다.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짜증나는 일이 많다고 투덜대더니 담배를 꺼내 문다. 그는 내게도 담배를 권했다. “금연 중”이라며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20여 종의 담배를 펼치며 “네가 피우던 담배가 뭐였지”라고 다시 물었다. 나도 모르게 예전에 즐겨 피우던 담배를 골랐다. 친구는 그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코앞에 들이댔다. 고민하다 무심코 담배를 입으로 물려는 순간, 술집과 친구는 사라지고 눈앞에 평화로운 수족관의 모습이 펼쳐졌다. 자칫 오래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울 뻔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머리에 쓰고 있던 특수헬멧디스플레이를 벗었다. 눈앞의 영상은 사라졌다. 서울시보라매병원에서 실시하는 가상현실 금연치료 체험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영화 ‘아바타’ ‘슈렉’ 등에서 활용한 3차원(3D) 기술을 의학에서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상현실 속 아바타 “한 대 피워봐”
금연치료 프로그램은 세 단계로 약 30분 동안 진행된다. 1단계는 3분 동안 마음을 안정시키는 ‘수족관 영상’을 본다. 2단계에서는 20분 동안 3D 입체영상과 음향시스템으로 만든 ‘흡연 위험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3분간 수족관 영상을 시청한다. 손가락에는 센서를 장착해 단계별로 근육긴장도나 맥박, 피부전도도 같은 생체 반응을 측정한다.
가상현실에 놓이는 2단계가 가장 중요하다. 여기서 흡연 욕구를 최대한 끌어낸다. 가상현실의 배경은 보라매병원 중독치료센터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결과를 토대로 만들었다. 술집 환경은 흡연자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느끼도록 설계했다. 술집 벽에 붙어 있는 광고 포스터, 테이블에 올려놓은 재떨이 하나까지도 흡연 욕구를 자극하도록 꾸몄다. 담배를 집요하게 권하는 아바타도 담배 연기를 실감나게 내뿜으며 유혹한다.
술집-흡연모습 등 실감재현 흡연욕구 최대한 이끌어내 “자극 반복노출로 유혹 극복 4주간 10명중 7명 금연 성공”
①최정석 보라매병원 신경정신과 교수가 환자의 흡연 욕구(근육긴장도)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가상현실 체험을 4회 반복했을 때
흡연 욕구는 6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② 가상현실 체험의 시작과 끝에 있는 수족관 영상. 이 영상은 체험자의 흡연 욕구를
급격히 떨어뜨린다. ③가상현실의 배경은 흡연 욕구를 참기 어려운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이다. 금연교실 참가자가 작성한 설문
내용을 바탕으로 설계됐다. ④가상현실에서 친구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1차로 흡연 욕구를 급상승시킨다. ⑤ 흡연을 권유받을 때
욕구가 최고조로 올라간다. 이때 수족관 영상이 갑자기 등장해 욕구를 떨어뜨린다. 자료 제공 보라매병원, 다쏘시스템
아바타는 치료받는 사람에게 스트레스 받는 일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흡연 욕구가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됐기 때문이다. 이때를 넘기더라도 위기는 계속된다. 좋아하는 담배를 고르게 하거나 직접 담배 필터를 코앞에 가져가 흡연 욕구를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최정석 보라매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단순히 흡연 장면을 보는 것보다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 놓이거나 친구가 담배를 권할 때 흡연 욕구가 더 크게 증가한다”며 “이에 대비하기 위해 심리학과 교수에게 자문해 가상현실의 사건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가상현실 금연치료 프로그램은 흡연 욕구가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에 갑자기 끝난다. 최 교수는 “흡연 욕구는 발생한 지 5분만 지나면 금세 사라지기 때문에 일부러 욕구에 반복적으로 노출시켜 이를 조절하도록 훈련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첫 번째 치료를 받는 동안 환자의 근육긴장도가 13μV(마이크로볼트·1μV는 100만분의 1V)에서 최대 32μV까지 치솟지만 4회째는 처음 5μV에서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근육긴장도는 환자가 흡연 욕구를 느끼며 흥분하는 정도와 비례한다. 반복적인 치료를 통해 유혹을 극복하는 것이다.
○ 치료 결과 학계에 보고
최 교수팀은 3, 4월 금연클리닉을 방문한 환자 10명에게 매주 한 번씩 4주 동안 가상현실 금연치료를 실시했고 7명이 성공했다. 가상현실 금연치료 프로그램의 효과다. 최 교수는 “흡연 욕구는 4주 전보다 60% 정도 줄어들었다”며 “니코틴 보조제 같은 약물 치료 효과와 비슷한 수준이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치료 결과를 논문으로 작성해 해외 학술지에 투고했다.
가상현실로 심리를 치료하는 전문 치료 자체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고소공포증, 비행공포증 환자들을 대상으로 치료가 시작됐다. 알코올 의존증이나 마약 중독 환자들에게도 여러 번 적용됐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이용해 금연을 유도하는 치료는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세브란스병원, 중앙대 용산병원 등 몇몇 병원에서 가상현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실시하지만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이다. 최 교수는 “가상현실 치료를 기존의 약물요법 같은 치료와 병행하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