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물리학상 심사위원인 뵈리에 요한손 웁살라대 교수는 “젊은 연구자들이 때로는 지도교수가 안 된다고 하는 연구도 시도해야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며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구를 강조했다.
1901년부터 올해까지 110년 동안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사람은 물리학상(188명), 화학상(159명), 생리의학상(196명) 등 모두 543명이다. 이 중 절반가량은 미국에서 배출됐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14명이 나왔다. 한국의 성적은 ‘0’이다. 동아일보는 노벨 수상자들의 기자회견과 대중강연, 시상식 등이 진행된 지난주 스웨덴 스톡홀름을 찾아 수상자들에게 노벨상 수상 비결을 물었다.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물리학상 심사위원과 생리의학상 심사위원을 현지에서 단독으로 각각 만나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노벨상 선정 과정의 실상을 들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선정할 때 ‘발명(invention)’에 가장 큰 비중을 둡니다. 화학상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가령 올해 물리학상 수상자 두 명은 스카치테이프를 써서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면서도 얇은 ‘그래핀(graphene)’이란 물질을 만들어냈지요.”
7일 스톡홀름 시내 그랜드호텔에서 만난 뵈리에 요한손 웁살라대 교수(노벨 물리학상 심사위원)는 물리학상 심사 기준의 1순위로 새로운 물질의 발명을 꼽았다. 요한손 교수는 10월 5일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물리학상 수상자가 전 세계에 생중계로 발표될 때 자리했던 심사위원 3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요한손 교수는 “그래핀 연구자가 세계적으로 1000명은 될 것”이라면서 “이 중에 누군가를 결정해야 하는 만큼 누가 그래핀을 가장 먼저 발명했는지 따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훌륭한 연구 성과를 냈더라도 후보자로 추천되지 않으면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며 “후보자로 추천되는 게 노벨상 수상으로 가는 첫 단추인 만큼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국제학회나 세미나 등에서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8일 카롤린스카 의대에서 만난 얀 안데르손 부총장(노벨 생리의학상 심사위원)은 “생리의학상은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패러다임의 전환)라고 불릴 만한 새로운 발견을 해낸 연구자에게 상을 주는 경향이 강하다”며 최초 발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안데르손 부총장은 20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예로 들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의 시발점을 놓고 당시 심사위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면서 “결국 에이즈를 일으키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처음 발견한 연구자들이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말했다. HIV의 발견이 패러다임 시프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안데르손 부총장은 “생리의학상은 상의 성격상 인류 삶의 질을 얼마나 향상시켰는지도 중요한 심사 기준으로 삼는다”며 “올해 수상한 시험관 아기의 경우 체외수정 기술이 종교적 윤리적 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심사위원들은 이 기술이 수백만 불임 부부에게 희망을 줬다는 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2007년부터 노벨 생리의학상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얀 안데르손 카롤린스카 의대 부총장은 “노벨 생리의학상은 최초 발견자에게 상을 주는 경향이 강하 다”고 말했다. 두 심사위원은 “(한국이 노벨 과학상을 타기 위해서는) 연구 주제를 자유롭게 결정하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며 “그래야 과학자들이 창의성을 발휘해 새로운 발명이나 발견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지도교수의 지시에만 의존하지 말고 때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연구도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연구에 재미를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며 재미를 느껴야 연구가 잘되고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강조했다. 안데르손 부총장은 최근 한국 정부가 20, 30대 신진과학자 100여 명에게 5년간 일자리와 연구비를 제공하는 ‘노벨 과학상 프로젝트’를 시작한 데 대해 “젊은 과학자의 연구를 지원하면 매우 창의적인 주제가 나올 것”이라면서 “한국의 첫 노벨상 배출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스톡홀름=이현경 동아사이언스 기자 uneasy75@donga.com
▼노벨상 선정과정 3대의혹 해부▼ 《노벨상 수상자 선정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9월 수상 분야별로 전 세계 3000여 명의 전문가에게 후보자 추천서가 발송된 뒤 이듬해 10월 수상자가 결정될 때까지 노벨선정위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문서로 기록된다. 그 내용은 50년 뒤에나 공개된다. ‘노벨위원회(Nobel Committee)’로 불리는 심사위원단은 스웨덴 연구자들로만 구성된다.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분과별로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원 5명으로, 생리의학상은 카롤린스카 의대 교수 5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이 110년 동안 노벨상 수상자를 결정해왔다.》
노벨상은 수상자 발표 이후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업이나 국가 차원의 로비 의혹이 불거지기도 한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실제로 상을 받기 2, 3년 전부터 ‘카더라’식의 ‘예언’이 오간다. 뵈리에 요한손 교수와 얀 안데르손 교수의 증언을 토대로 노벨상 선정을 둘러싼 3대 의혹을 파헤쳐봤다. ○ “해킹 우려 e메일 대신 우편접수”
9월 시작된 후보자 추천은 이듬해 1월 31일 마감된다. e메일이나 팩스 발송은 절대 사절. 오로지 우편으로만 받는다. 해킹이나 조작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노벨위원회는 이때부터 바빠진다. 선정위원회는 2월에 수천 명의 후보자를 250∼350명으로 일차 압축한 뒤 3∼5월 분야별 외부 전문가에게 후보자의 업적을 자세히 평가받는다. 이 과정이 끝나면 수상자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최종 후보자가 결정되는 셈이다. 6월부터 선정위원회는 이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후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분과별 총회(물리학상, 화학상)와 카롤린스카 의대 총회(생리의학상)에서 투표로 수상자가 결정된다. 다수결이 원칙이지만 3개월여 동안 심사위원들이 많은 토론을 거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수상자는 만장일치로 결정된다.
이런 과정 때문에 최종 후보자가 대략 결정되는 5월 말∼6월 초가 되면 노벨상 수상자는 사실상 ‘내정’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하지만 요한손 교수는 “(수상자가 누가 될지) 분위기는 대충 결정되지만 혹시나 사전에 노출될까봐 발표 45분 전에야 수상자를 최종 결정한다”고 말했다. 수상자에게는 발표 10분 전 전화해 귀띔만 해준다.
○ “심포지엄과 수상은 별개”
노벨상의 주인공들은 매년 심사위원단인 노벨위원회의 치열한 논의를 거쳐 탄생한다. 수상자 선정 과정은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돼 더욱 궁금증을 낳는다. 사진은 이달 6일 스웨덴 스톡홀름에 위치한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열린 2010년 노벨상 수상자 기자회견 장면이다. 왼쪽부터 경제학상 수상자(3명)와 물리학상 수상자(2명). 스톡홀름=이현경 동아사이언스 기자 uneasy75@donga.com 노벨재단은 1965년 이후 수상 분야별로 매년 5, 6월 ‘노벨 심포지엄(Nobel Symposia)’을 연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심포지엄에 연사로 초청되면 적어도 3, 4년 안에 노벨상을 받는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돈다. 노벨 심포지엄이 노벨상 수상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행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심포지엄 위원회(Symposium Committee)’가 노벨위원회 심사위원장들로 구성된 점도 이런 ‘가설’에 무게를 싣는다. 공교롭게도 올해 물리학 분야에서 노벨 심포지엄의 주제는 물리학상을 거머쥔 ‘그래핀의 물리학’이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알려진 재미 한국인 과학자 김필립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도 심포지엄 연사 중 한 명이었다.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화학 분과 회원인 마티아스 울렌 교수(스웨덴 왕립공대 생명공학과)는 “심포지엄은 노벨재단에서 진행하는 별도 프로그램으로 1년 전에 주제가 결정된다”며 “시점이 맞지 않아 수상자를 결정하는 데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못 박아 말했다. 노벨재단 홈페이지에는 내년 5월 26∼29일 ‘마음, 기계 그리고 분자(Mind, Machines and Molecules)’를 주제로 노벨 심포지엄을 연다는 공지가 떠 있다. 노벨위원회는 이와는 별도로 이미 내년도 후보자 추천을 받고 있다.
○ “수상자 국적보다 업적 더 중시”
노벨상 선정위원회가 스웨덴 연구자들의 ‘이너 서클’인 탓에 선정위원과 친분이 있는 특정 대학이나 연구소의 전문가들이 후보자를 추천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있다.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수상자의 국적을 일부 고려할 것이란 예상도 있다. 실제로 최근 30년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은 수상자 배출 실적이 줄어드는 추세인 반면 일본은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요한손 교수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서 논문을 읽을 때 연구자의 이름을 먼저 보지, 국적을 확인하지는 않는다”며 “심사할 때도 업적을 우선 따지지, 국적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선정위원회는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반도 소재 대학 교수들과 노벨상 수상자들을 제외하고는 매년 대학을 바꿔가며 후보자를 추천하게 하고 있다. 추천인은 서로 모르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안데르손 부총장은 “서울대 의대에서도 생리의학상 후보를 추천받았다”고 말했다.
이 밖에 요한손 교수는 심사위원에 대한 외부의 로비 가능성에는 “스웨덴 연구자들의 정서상 로비를 받는다는 것은 과학자 개인에 대한 모독으로 여긴다”고 설명했다. 안데르손 부총장은 “스웨덴 과학자가 후보로 추천되면 더욱 엄격하게 심사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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