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미국 플로리다에서 유학할 때 일이다. 하루는 대형농장 한 곳을 방문했다. 농장 주인이 어떤 나무 아래에 멈춰 서더니 웃으며 말했다. “미스터 정, 신기한 경험 한번 해볼래요?”
그는 주머니 속에 있던 레몬을 꺼내 먹어보라고 했다. 인상이 구겨질 만큼 매우 신맛이 났다. 그러곤 나무에 달린 빨간 열매를 따서 건네줬다. “이걸 한 입 먹어 보고 다시 레몬을 먹어 봐요.”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신맛이 강했던 그 레몬이 사탕같이 달콤하지 않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하는 나를 두고 농장 주인은 껄껄 웃어댔다.
빨간 열매의 이름은 바로 미러클 프루트(Miracle Fruit). 이름 그대로 ‘기적의 과일’이다. 미러클 프루트는 신맛을 감쪽같이 단맛으로 바꿔 버린다. 그날 식품을 전공하는 필자의 머릿속엔 하루 종일 크랜베리 색깔에 아몬드 모양을 한 그 작은 과일만 떠올랐다.
학교로 돌아온 뒤에 좀 더 알아보기 위해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자료를 찾아 보니 미러클 프루트 나무의 원산지는 서아프리카였다. 서아프리카에선 오랫동안 달콤한 야자술을 만드는 용도로 미러클 프루트를 사용했다. 또 옥수수빵의 신맛을 개선하는 등 신맛의 음식을 달콤하게 만들기 위한 용도로도 썼다.
맛을 변화시키는 ‘마술’은 어떤 조화 때문에 가능할까. 그 열쇠는 빨간 열매 속에 들어있는 당(糖) 단백질인 미러쿨린에 있다. 열매에 함유된 미러쿨린은 사람이 맛을 느끼게 하는, 혀 윗면의 미뢰(味·맛봉오리)에 작용해 신맛을 단맛으로 바꾸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미러쿨린의 효과가 영구적이진 않다. 그 효과는 미러쿨린이 침에 다 씻기기 전인 한 시간가량만 지속된다.
이 열매는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미러쿨린은 당 섭취가 제한된 당뇨 환자들에게 유용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이미 나와 있다. 미러쿨린을 이용하면 당뇨 환자들이 마음 놓고 단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미러클 프루트는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식욕이 감퇴해 고통 받는 환자들에게 기적을 선물할 수도 있다. 미국 플로리다의 한 종양학자는 항암치료로 인해 어떠한 음식을 먹어도 쇠를 씹는 듯한 맛만 느끼는 암 환자들에게 미러클 프루트를 섭취하게 했다. 그랬더니 영양실조로 고생하던 환자들의 식욕이 눈에 띄게 좋아져 체중이 늘어났다.
미국이나 일본에선 일반인이 미러클 프루트를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다. 또 미러클 프루트는 다이어트보조제 등 다양한 형태로도 판매되고 있다.
이에 비해 국내에선 아직 미러클 프루트에 대해 알려진 게 별로 없다. 그 활용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아프리카 원산인 미러클 프루트를 재배하기 힘든 기후조건이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기후가 비슷한 이웃 나라 일본에선 한 연구팀이 기후 측면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미러쿨린을 함유한 유전자 조작 토마토를 개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기후와 지형 조건에 적합한 미러쿨린 함유 작물을 개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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