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연구실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많지는 않아도 가끔 환자에게서 감사의 편지를 받는다. 반가운 마음에 열어 보니 흰 A4용지 위에 짧은 인사말이 쓰여 있었다. 이리저리 한자를 섞어 비뚤비뚤 쓴 편지였지만 마음을 다해 꼭꼭 눌러쓴 정성이 느껴졌다.
환자의 이름을 되새겨 보니 ‘길랑바레증후군’을 앓았던 90대 김모 할머니였다. 이름도 이상한 ‘길랑바레증후군’의 정확한 병명은 ‘급성 염증성 탈수초성 다발성 신경병증(AIDP)’이다. 신종 인플루엔자 사태 때 주목받았던 질병이다.
미국에서 1970년대에 인플루엔자가 유행할 때 인플루엔자 백신을 대량으로 예방접종한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인체의 면역체계가 교란되면서 말초신경계에 염증이 생긴 환자가 나타났다. 이 질환을 앓는 환자의 5% 정도는 팔다리와 호흡 근육이 마비된다.
이 경우 결국 기계로 호흡해야 한다. 가느다란 관을 기도에 꼽아 호흡기에 연결하는 식이다. 이것도 어려우면 성대 바로 아랫부분의 기관지를 절개해 산소의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기관절개술이라 한다.
편지의 주인공은 이 기관절개술을 했던 환자였다. 과거에도 1년 이상 기관절개술을 하고 호흡기를 사용하다가 회복된 환자를 봤다. 하지만 이 할머니는 워낙 고령이어서 걱정이 컸다. 성대 아래로 기관절개술을 하면 환자는 말을 할 수가 없어 필담이나 신체언어로만 소통해야 한다.
김 할머니는 팔까지 마비돼 글을 쓰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정확한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의료진은 신체언어로라도 의사소통을 하려고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의사소통이 조금씩 가능해졌고 할머니 건강도 좋아졌다.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할머니는 건강을 회복하고 재활치료에 들어갔다. 이 단계에서 필자에게 편지를 보낼 만큼 몸이 회복된 것이다.
사실 바쁜 회진 시간에 성대를 잘 쓰지 못하는 환자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란 쉽지 않다. 수많은 환자가 복도에 줄을 서 있는 상황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은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러나 환자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의사소통 부족만큼 갑갑한 일도 없다. 더구나 의사가 사무적인 말만 늘어놓다가 진료를 끝내버리면 환자의 심정은 막막할 뿐이다. 의사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김 할머니를 치료하면서 말이나 필담으로 환자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해도 신체언어로 통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김 할머니는 의료진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큰 위로를 받고 기력을 회복했다고 믿는다. 편지를 보며 환자와 소통하는 의사가 되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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