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한 데 대한 논란이 많다. 이 논란과 별도로 살펴봐야 할 게 있다. 피임에 대한 지식이나 피임 방법과 관련해 우리나라는 여전히 후진국 수준이라는 점이다. 외국에선 어떻게 하고 있을까. 또 원하지 않는 임신을 막기 위한 방법은 뭘까.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최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피임학회 참석자인 리 슐먼 미국 시카고 노스웨스턴대 파인버그 의대 산부인과 교수, 앤드루 주슈먼 호주 서덜랜드병원 산부인과 과장, 최두석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교수를 만났다.
▽이진한 기자=국내 미혼모의 낙태율은 1000명당 14.1건으로 높습니다. 성 경험을 시작한 나이도 점점 낮아져 요즘 평균 14.6세입니다. 반면 여성 피임약 복용률은 2.7%로, 서구 가임기 여성의 40%보다 훨씬 낮습니다. 우린 낙태율은 높은 반면에 피임률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리 슐먼 교수=미국에선 피임을 당연시합니다. 피임을 안 하고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입니다.
▽앤드루 주슈먼 과장=호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성이 콘돔을 사용해 피임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최두석 교수=한국은 아직도 피임에 대해 소극적입니다. 피임을 하더라도 피임약이나 콘돔을 사용하기보다는 체외사정을 하거나 배란기를 피해 성관계를 합니다. 그러나 실패율이 높아 산부인과는 이를 피임법으로 권장하지 않습니다. 실제 낙태를 두 번 이상 경험한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체외사정이나 주기 조절을 통해 피임을 했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습니다. 체외사정의 경우 남성이 스스로 조절하기 어렵고, 또 사정 전에 나오는 액체에도 정자가 있어 임신될 확률이 있습니다. 배란기 또한 생리가 불규칙하면 예측이 힘들고 매달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정자는 체내에서 3, 4일 동안 살아 있어 배란기를 피하더라도 임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남성은 콘돔을 꺼리고, 여성은 피임약 복용을 꺼립니다. 왜 그럴까요?
▽최=피임약을 오래 먹으면 불임이 된다, 피부 트러블이 생긴다 등의 오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피임약을 복용했다 해도 피부 트러블은 생기지 않습니다. 또 피임약이 여성의 가임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세계보건기구(WHO)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피임약을 자주 먹는 미국과 영국의 국민도 불임이 많지 않습니다.
▽주슈먼=호주는 싱글일 때 피임약을 오래 먹었지만 이후 결혼해서 자녀를 서너 명 낳는 여성도 많습니다.
▽이=흔히 피임은 남자가 알아서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슐먼=피임은 남성과 여성이 각자 자기 몸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피임을 남성에게 의존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안타깝습니다.
▽최=우린 피임약을 먹는 여성에 대해 성적으로 개방적일 것이라 생각하는 부정적인 경향이 있어 꺼리는 것 같습니다. 피임이 필요한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국내 여성들은 스스로 피임을 하기보다는 콘돔 사용이나 질외사정처럼 남성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요.
▽주슈먼=성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모를까, 성관계는 하면서 피임을 터부시한다는 것은 좀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호주에서는 서로가 성관계를 할 계획이 있다면 피임약 복용과 콘돔 사용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피임을 통해 미성년자의 임신이나 무분별한 낙태를 줄이는 것은 미국이나 호주에서도 사회적인 이슈일 것 같은데요. 낙태를 줄이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있나요?
▽슐먼=낙태를 줄이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있다기보다, 산부인과가 올바른 피임 방법을 사용할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주슈먼=호주에서는 여러 단체가 성교육과 피임 방법 교육을 전국에서 공개적으로 진행해 피임 정보를 어디에서나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이=학교에서 성교육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성이나 피임에 대한 내용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알려주나요?
▽슐먼=미국에서는 성교육을 학교, 교회, 시민단체 등 다양한 곳에서 제공합니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성교육은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슈먼=성교육 프로그램이 효과를 거두려면 성과 피임에 대해 마음을 열어 이야기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성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나라에서 금기시되는 주제였지만, 이제는 성교육을 받는 것이 대세입니다. 호주에서는 학교 및 각종 단체가 성교육을 제공합니다. 또 부모는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는 성과 피임 정보 가운데 올바른 것을 골라내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최=우리도 최초 성 경험 연령이 낮아지면서 생식기나 혼전 순결을 강조하던 성교육에서 책임 있는 성과 피임법에 대해 가르치는 방식으로 점차 변화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보건 교사들이 학교에서 사용하는 보건 교과서에는 콘돔과 피임약의 장단점과 사용 방법 등 실질적인 피임 방법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설명돼 있습니다. 부모만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공신력 있는 정보 채널이 있나요?
▽최=많은 분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습니다. 질문과 답변도 인터넷에서 주고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조언을 해준 분이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피임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면 가까운 산부인과에서 피임 상담을 받는 걸 권합니다. 산부인과에서는 개인의 건강 상태와 상황에 맞는 피임법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2001년부터 YMCA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는 ‘아하! 청소년 성 문화센터’(www.ahacenter.kr)를 통해서도 성과 피임에 대한 교육 및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음 성을 경험하는 나이는 점점 낮아지고 있는데, 성관계나 피임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여전히 아쉽습니다. 이젠 우리 국민이 올바른 방법으로 피임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도록 정부와 학계가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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