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는 전설적인 카사노바가 등장한다. 이름마저도 ‘성기’인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여자라도 사랑의 노예로 만들 수 있다. 자신은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서 말이다. 강릉의 바닷가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려는 그를 여인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장성기가 아무리 매몰차게 뿌리쳐도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여인들의 마음은 오직 그만을 향한다. 가정까지 내팽개친 여인들은 “장성기는 내 것”이라며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국제 경쟁력까지 갖춘 한국형 카사노바인 셈이다.
장성기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다. 여성의 마음을 쉽게 빼앗지만, 무서울 만큼 냉정하다. 보통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남자에게 빠지는 여성의 행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도대체 왜 여성들은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것일까. 그의 냉정한 행동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왜 나쁜 남자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헌신행동의 마력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여성들은 짝을 고를 때 남성의 ‘자원 제공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여성은 임신과 자녀 양육으로 자원 획득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들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면 충분한 자원을 가진 남성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원 제공 능력을 가장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단서로는 남성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 학력 등이 있다.
그런데 여성들은 다시 고민에 빠져든다. 남성이 자원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더라도 과연 그 자원을 자신과 자식에게 기꺼이 제공할 의향이 있는가 하는 고민이다. 남자가 가진 자원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남자의 마음은 쉽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여성에게는 남성의 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단서가 필요하다. 바로 ‘헌신성’이다.
여성은 오랜 기간 진화를 거듭하면서 이 헌신성을 남성의 진심을 확인하는 단서로 사용하게 됐다. 데이비드 버스 미국 텍사스대 교수(진화심리학)의 연구는 ‘사랑에 빠졌을 때 하게 되는 가장 전형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이 ‘상대에 대한 헌신’을 꼽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기꺼이 비싼 선물을 사주며, 힘든 일을 이야기하면 귀 기울여주고, 어려움에 처하면 발 벗고 도와주는 등의 행태이다. 여성은 이런 행동을 통해 남자친구 또는 남편이 자신에게 장기적으로 헌신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자원 제공 능력이 있는 남성이 자신에게 헌신행동을 지속하면, 여성은 드디어 운명의 짝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나쁜 남자의 주특기
나쁜 남자들이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이 헌신행동이다. 나쁜 남자는 처음부터 나쁜 남자가 아니다. 우리가 나쁜 남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중의 하나는 나쁜 남자가 관계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실제 나쁜 남자들은 관계의 시작에서부터 상당한 시간 동안(여성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전적으로 상대를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못되게 구는 남자는 그저 ‘나쁜 놈’에 불과하다. 나쁜 놈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자는 없다.
문제는 나쁜 남자들의 헌신에는 진심이 없다는 것이다. 나쁜 남자들의 헌신은 목표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작전의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여성의 마음을 얻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볼 수 있는 건 마음이 아니고 자신의 행동뿐이라는 사실을 나쁜 남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헌신행동을 ‘수단’으로 여기는 나쁜 남자는 그 행동을 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도 않는다. 목표물이 정해지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작업에 들어간다.
반면 착한 남자나 이도 저도 아닌 보통 남자들(이하 착한 남자)은 헌신행동을 하기에 앞서 많은 고민을 한다. 이 여성을 짝으로 선택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자신이 그녀를 정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등을 순진하게 따져보는 것이다. 착한 남자들의 헌신행동은 고민의 단계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니 매력이 없다. 망설임 없이 이뤄지는 나쁜 남자의 위장된 헌신행동은 여성에게 무조건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으로 해석된다. 여성들이 나쁜 남자에게 빠지는 이유다.
헤어나기 힘든 중독성
나쁜 남자의 계획된 헌신행동에 매혹된 여성에겐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난다. 사랑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준을 갖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남자의 헌신행동을 직접 경험하고 나면, 그게 진짜 사랑이고 그런 사랑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굳게 믿게 된다. 그러면 착한 남자들의 계획되지 않은 마음은 ‘진정한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고민의 시간이 필요한 착한 남자들의 마음은 헌신행동의 단계로 넘어가기도 전에 ‘가짜’ 또는 ‘함량 미달’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다.
나쁜 남자를 통해 체험한 헌신행동을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했던 ‘진짜 사랑’이라고 믿는 여성은 결국 나쁜 남자에게로 달려가게 돼 있다. 상처받고 헤어졌던 과거의 나쁜 남자에게 돌아가거나, 또 다른 나쁜 남자를 만나거나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혹시 당신도 나쁜 남자의 헌신에 중독돼 있진 않은가.
일상생활에서 나타날 수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심리를 연구하고 있다. ‘심리학의 힘 P’(북하우스·2011년)와 ‘내 마음도 몰라주는 당신 이유는 내 행동에 있다’(21세기북스·2012년) 등을 썼다. 앞으로 ‘O₂’에서 영화나 영화 속 인물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심리를 재미있고 알기 쉽게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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