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남극 세종기지가 주목받았다. 언론을 통해 한 대원이 다른 대원을 폭행하는 장면이 공개됐던 것. 이를 통해 외부와 고립된 이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후 남극 세종기지 대원의 심리상태를 분석한 연구 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2월 27일 오후 서울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열린 ‘제1회 극의학 심포지엄’에서 조경훈 극지연구소 공중보건의사는 ‘남극 생활이 수면주기와 기분 및 심리상태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2012년 남극 세종기지 월동의사로 1년간 근무한 경험과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이헌정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과 교수가 세종기지 월동의사들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연구진은 남극 대원들은 밤샘 당직업무, 햇빛이 거의 없는 환경 등으로 수면리듬이 깨지기 일쑤라는 것에 주목하고 ‘수면리듬’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반적으로 수면리듬이 깨지면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고,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수면리듬이 깨지는 악순환으로 업무효율은 물론이고 대인관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액티와치(Actiwatch)라는 손목시계 형태의 장비를 남극 월동대 대원 모두 24시간 착용하고 생활하게 했다. 액티와치는 진동과 빛을 감지해 사람이 언제 잠이 들었는지, 햇빛은 언제, 얼마나 받았는지를 기록해주는 장치다.
2010년 1차 실험에서는 액티와치를 대원들에게 나눠준 뒤 설문조사를 통해 자료 수집에 집중했다. 이와 함께 남극 월동의사들은 대원들의 머리카락과 타액을 이틀에 한 번씩 채취해 냉동 보관하는 한편 기분과 심리상태를 측정하는 설문조사표를 일주일에 한 장씩 작성하도록 했다.
그 결과 남극의 일조량이 크게 줄어드는 4∼9월에 대원 대부분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시기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우울지수, 무기력지수, 공격성지수 등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2차 실험 때는 실험기간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 전반부에는 2010년 때와 같이 단순 조사만 했다.
후반부에는 태양광과 비슷한 파장을 내는 ‘라이트박스’를 설치해 낮 시간에 의무적으로 30분 이상 원하는 만큼 쬐도록 했다. 단, 오후 6시 이후에는 라이트박스를 쓰지 않도록 했다. 이는 대원들의 수면리듬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라이트박스를 사용한 후 대원 대부분의 잠의 질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조사 결과 우울지수는 물론이고 공격성지수도 크게 감소했다. 라이트박스를 쓴 후 피로-무기력지수도 줄어들었다.
조 씨는 “우울지수, 공격성지수, 피로-무기력지수 등은 주관적인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객관성이나 타당성을 확보하기는 어렵지만 수면리듬이 스트레스와 연관관계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며 “새로 건설되는 남극 장보고기지에는 라이트박스 설치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이번 여름 쇄빙선 아라온호에 실려오는 남극 대원들의 머리카락과 타액 샘플로 추가 분석을 진행할 계획이다. 머리카락은 수면 상태, 타액은 호르몬 변화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김한겸 대한극지의학연구회 회장은 “아직 중간발표 단계지만 남극 세종기지 대원들의 정신상태를 처음 조사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며 “이번 연구 결과는 남·북극 파견 과학자는 물론이고 장기간 항해를 나서야 하는 외항선원, 잠수함 등에 탑승하는 군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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