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악순환 간질, 환자 76%가 月 50만원도 못 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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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뇌전증 자녀가 있는 부모들을 위한 세미나가 열렸다. 강훈철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신경과 교수가 강의하고 있다. 장미회 제공
지난달 3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뇌전증 자녀가 있는 부모들을 위한 세미나가 열렸다. 강훈철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신경과 교수가 강의하고 있다. 장미회 제공
지난달 초 경기 의정부의 한 주민센터에서 간질 환자 박진영 씨(39)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 씨는 유서에서 “그동안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으며 겨우 살았는데 올해 장애인등급심사에서 ‘등급 외’ 판정을 받아 수급자에서 탈락하게 됐다. 억울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1∼4급 장애인을 근로무능력자로 판단하고 매월 일정한 기초생활비를 지급한다. 하지만 등급 외 판정을 받으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돼 조건부로 생활비가 지급되거나 아예 수급 자격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박 씨가 수급권 박탈을 이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현숙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박 씨는 간질 환자라는 이유로 직업도 가지지 못하고 학업까지 포기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초생활수급권까지 박탈당할 위기에 놓이자 삶의 희망을 잃은 것”이라고 전했다.

국내에는 박 씨처럼 경제적 빈곤과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간질 환자가 2008년 이후 14만 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병원 치료를 받지 않는 환자들까지 합하면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50만 명까지 그 수가 늘어날 것이라고 추산한다.

간질 환자들은 자신들이 겪는 가장 어려운 문제로 취업을 손꼽는다. 간질 병력이 있으면 기업이 채용 자체를 꺼리거나 다니던 회사에서도 해고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박 씨 역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일용직을 전전했지만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일을 그만둬야 했다.

간질 환자들이 겪는 경제적 빈곤은 통계적으로도 증명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11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으로 등록된 간질 환자의 75.8%가 월평균 수입이 50만 원도 채 안 된다고 응답했다. 이는 2013년 기준 1인 가구 최저 생계비(57만2168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간질 환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경제적 빈곤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정생활에서도 심각한 갈등을 일으킨다. 서울 동작구에 살고 있는 간질 환자 오모 씨(33·여)는 2년간의 결혼생활을 지난해 정리했다. 간질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시댁에 숨기고 결혼했다가 시댁을 처음 방문한 자리에서 경련을 일으킨 탓이었다. 오 씨는 “시부모님들은 간질이 약으로 다스릴 수 있는 병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집안에 절대로 들여서는 안 될 존재로 취급했고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간질 환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면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을 깨뜨리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지적한다. 사회적 편견과는 달리 간질은 약물치료와 수술을 통해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손영민 서울성모병원 신경과 교수는 “심각한 수준의 난치성을 제외한 80% 정도의 간질 환자들이 약물과 수술을 통해 발작을 제어하고 있다”며 “간질 환자들의 자기 통제력이 높아진 만큼 이들을 보는 색안경을 벗고 직업 선택의 폭을 넓혀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간질은 상당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유전병도 아니다. 신현숙 뇌전증협회 사무국장은 “간질이 유전병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의학적으로 증명됐다”며 “간질 환자를 식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우리 내부의 뿌리 깊은 혈통주의를 깨뜨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간질 환자들을 위한 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보건당국은 2003년부터 간질을 장애로 분류하고 환자들에게 장애등급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2011년 말 기준으로 국가에 등록된 간질장애인은 9772명에 불과해 다른 장애에 비해 등록률이 크게 떨어지는 편이다. 신 사무국장은 “간질장애인의 판정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장애 등급이 2∼5급으로 좁게 한정된 결과”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 관계자는 “예산과 다른 질환과의 형평성 문제로 간질장애인에 대한 지원을 당장 확대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간질 치료비에 더 많은 건강보험금을 지원해야 한다는 요구도 적지 않다. 파킨슨병을 비롯한 뇌혈관 질환은 건강보험 산정특례 적용으로 환자가 본인부담금의 5%만 지불한다. 손 교수는 “간질 환자들은 진료비 약값 수술비의 본인부담금을 모두 부담한다”며 “간질환자 대부분이 심각한 경제적 궁핍을 겪고 있는 만큼 산정특례 적용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 간질(Epilepsy) ::

뇌신경세포의 비정상적 활동으로 경련과 발작이 반복되는 질환. 귀신 들린 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나쁜 이미지가 붙어 있다. 부정적 인식을 없애기 위해 의학계에서는 뇌전증으로 부르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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