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너머 반짝이는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그가 팔순을 훌쩍 넘겼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김성진 대한결핵협회 고문(85). 국내 결핵퇴치운동의 산증인이다.
김 고문은 평안북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1949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무척 따랐던 삼촌이 40대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등졌다. 삼촌의 아들도 같은 병으로 삼촌의 뒤를 따랐다. 김 고문은 “결핵으로 일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모습을 보면서 반드시 의사가 되어 이 땅에서 결핵을 몰아내리라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가 결핵퇴치사업에 본격적으로 투신한 건 1956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결핵원의 실험부장이 되면서부터다. 그때는 모든 게 부족했다. 감염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흉부 X레이조차 찾기 어려웠다.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골수까지 침투한 결핵균으로 허리가 굽고 고름이 터지는 환자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치료하고, 사재를 털어 치료 장비와 약을 구입했던 이유다. 그렇게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김 고문은 지금까지 한국의 결핵퇴치운동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1965년 처음 실시된 ‘결핵실태조사’에서 전체 국민의 5.1%나 되던 결핵환자 비율은 현재 0.1%대까지 떨어졌다. 사망률도 함께 감소했다.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이유로 결핵을 폐가망신 병이나 망국 병으로 부르던 시기는 지났다. 그는 “한국의 결핵퇴치사업은 전 세계 감염병 학계에서도 질병퇴치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힌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고문은 대한결핵협회의 창립 60주년(6일)을 앞두고 “여전히 안심하긴 이르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서울의 A고교와 대전 KAIST 학생들에게서 결핵이 단체로 발병한 일을 언급했다.
실제로 한국의 결핵 감염률은 아직까지 세계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수난을 겪으며 결핵환자가 급격히 늘어난 여파가 여전히 남아있어서다. 그는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민관이 함께 결핵균 박멸에 나서야 한다. 선진국 수준이 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강조했다.
생애 마지막으로 김 고문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은 고향인 북한 땅에 결핵 전문 의료기관을 세우는 일이다. 결핵 관련 대북지원은 1999년 시작됐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잠정적으로 중단된 상태다. 김 고문은 “정치상황과 무관하게 당장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기 위한 인도적 의료지원은 계속되어야 한다. 결핵으로 고통받는 북녘의 동포를 구하고 의료진을 교육하는 병원이 설립되는 모습을 생전에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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