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립선(샘)암 전문의인 나의 환자 중에는 10년 전 전이성 전립선(샘)암을 진단받은 A 씨가 있다. 그동안 남성호르몬 차단 요법을 받아왔지만 이제는 내성으로 이 요법이 듣지 않는다. 남은 수단인 항암요법은 부작용이 심하고 치료 효과도 없어 현재는 그저 통증을 완화시키는 정도의 치료를 받으며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전립선(샘)암은 세계적으로 가장 흔한 비뇨기계 종양 중 하나로 미국에서는 가장 발병 빈도가 높은 남성 암이다. 한국에서도 최근 10년간 매년 12.6%씩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식생활의 서구화 추세로 봤을 때 한국도 머지않아 가장 흔한 남성 암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행스럽게도 전립선(샘)암의 80∼90%는 수술로 완치된다. 하지만 치료 시기를 놓치거나 적절한 수술을 했는데도 오히려 병이 악화돼 결국 주변에까지 암세포가 전이되는 때가 있다. 이런 때는 남성호르몬 차단 요법을 시행한다.
상당 기간은 이 요법이 효과가 있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암세포가 자체적으로 남성 호르몬을 만들어 낸다. 결국 A 씨같이 호르몬치료와 항암치료가 모두 듣지 않는 말기로 진행하며 이는 전체 전립선(샘)암 환자의 2% 정도에 이른다. 이 환자들은 극심한 고통으로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말기 전이성 전립선(샘)암 환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매우 안타까웠다. 그런데 2년 전 몸에서 생성되는 남성 호르몬은 물론이고 암세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남성 호르몬까지도 완벽하게 차단해 말기 환자도 실질적인 치료 효과를 볼 수 있는 혁신적인 신약이 개발됐다. 2012년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이 약의 사용을 허가해 국내 환자들도 곧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년 4개월이 지난 지금, 안타까움은 사라졌지만 대신 ‘화’가 생겼다. 약이 있는데도 환자들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이 약에 보험을 적용하지 않아 약값을 감당할 수 없는 대부분의 환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건강보험 재정을 어느 곳에 우선적으로 투입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생명이다. ‘생명’을 지키는 일이 의사의 첫째 소임이며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도 이는 분명하게 명시돼 있다. 정부도 4대 중증질환의 보장성 강화를 보건의료 분야의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전립선(샘)암 중증질환자는 전체의 2%인 말기 환자들이다. 이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신약을 보다 쉽게 쓸 수 있다면 적어도 전립샘암 분야에서는 중증질환 보장성을 충분히 강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희망 없이 살아가는 A 씨를 외래진료실에서 만날 때마다 도움을 줄 수 없어 느끼는 한계의식과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의료선진국을 표방하는 한국에서 아직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신약을 쓰지도 못하고 삶을 마감해야 하는 환자를 대할 때면 의사로서 가끔은 두렵기까지 하다. 차라리 안타까울 때가 더 좋았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길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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