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전 한국은 국제기구 본부인 국제백신연구소(IVI)를 유치했다. 세계 보건을 위해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값싼 백신을 개발 보급하는 사명을 수행한다. 백신 상용화에는 개당 1조 원 이상의 연구개발비가 들지만 당시 IVI에는 그만한 재원이 없었다. 또 신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을 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사업성’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저개발국에 쓰기 적합한 값싼 콜레라 백신이 개발돼 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IVI와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 한국 정부 등이 협력한 결과다.
IVI는 백신 개발에서 중요한 틈(gap)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백신 산업에는 다른 첨단 산업처럼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이 있다. 아이디어가 좋아도 투자에 뒤따르는 위험이나 비용이 높으면 이 계곡을 건널 수 없다. IVI는 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됐다.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값싼 백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게이츠 재단은 재정 지원에 나섰다.
값싼 콜레라 백신은 한국 정부 지원으로 IVI 실험실에서 시작돼 한국과 해외 기업들에 기술 이전됐고 국내 생명공학기업인 유바이오로직스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최근 수출 승인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IVI에 지원하는 돈이 100원이라면 국내 백신 기업들이 세계 백신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연구지원금 200원이 해외에서 들어온다. IVI는 같은 방식으로 SK케미칼과 함께 장티푸스 백신 상용화도 진행 중이다.
값싼 콜레라 백신의 상업화는 바로 효과를 내고 있다. 최근 말라위에서는 홍수로 30만 명이 이재민 캠프에서 생활하고 있어 콜레라가 대규모로 발생했다(2010년 아이티와 2013년 남수단에서는 콜레라로 1만여 명이 희생됐다). 콜레라 창궐에 대비하기 위해 말라위 정부, IVI, 한국 정부, 기아자동차, 세계보건기구 등이 함께 10만여 명에게 예방 접종을 했다. LG전자 후원으로 에티오피아에서도 백신을 주사했고 대지진이 일어난 네팔에서도 접종이 추진되고 있다.
실험실 연구가 주요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 생명을 구하는 직접적인 효과를 내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백신제품 상용화에 성공한 비영리기관은 IVI를 포함해 단 2곳뿐이다. 이는 생명공학과 백신 연구에 대한 정부 투자의 가치가 높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과 스웨덴, 게이츠 재단 지원으로 IVI 같은 기구들은 21세기 지식기반 산업과 세계 보건 사이의 틈을 채운다. 이야말로 한국이 이루고자 하는 창조경제의 사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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