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美서 배운 의술… 라오스 - 탄자니아에 베풉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30일 03시 00분


한국판 ‘미네소타 프로젝트’ 이종욱 펠로의 빛나는 활약

‘이종욱 펠로십’ 연수생들은 한국 병원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한국식’ 진료, 회의, 병원운영 등을 경험하게 된다. 인제대 일산백병원은 의료진 당직 보고 회의에도 이종욱 펠로십 연수생들을 참여시키고 있다. 인제대 일산백병원 제공
‘이종욱 펠로십’ 연수생들은 한국 병원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한국식’ 진료, 회의, 병원운영 등을 경험하게 된다. 인제대 일산백병원은 의료진 당직 보고 회의에도 이종욱 펠로십 연수생들을 참여시키고 있다. 인제대 일산백병원 제공
오늘날 한국이 국제적인 수준의 의료 시스템을 갖추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기관은 어느 곳일까.

상당수 국내 의료인들은 미국 미네소타대를 꼽는다. 1955∼1961년 미네소타대가 서울대 의대를 중심으로 국내 의료진에게 제공한 연수 프로그램인 ‘미네소타 프로젝트’ 때문이다.

당시 개발도상국(개도국)이었던 한국의 고급 의료 인력에게 선진 의료 교육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취지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를 통해 226명의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최소 3개월, 최대 4년 동안 미네소타대에서 연수를 받았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세계보건기구(WHO)를 포함한 많은 국제기구가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의 의학교육과 의료진 양성체계가 틀을 잡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며 “제2차 세계대전 뒤 선진국이 개도국에 제공한 원조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모델들 중 하나로 꼽힌다”고 말했다.

한국판 미네소타 프로젝트

60년 전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와 지금의 한국 의료 수준은 다르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발전 못지않게 한국의 보건의료 시스템 특히 의료진 양성은 국제기구와 개도국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는 분야 중 하나다.

데이비드 나바로 유엔 에볼라대책 조정관은 지난달 동아일보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단기간에 국제적인 수준의 보건의료 시스템을 구축한 나라”라며 “한국이 국제사회에 가장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의료진 양성 노하우를 개도국에 전달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적지 않은 국내 의대들이 개도국 의료진들에게 다양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외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보건의료 부문 국제원조로 꼽히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KOFIH)이 2007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이종욱 펠로십’이다.

한국인 최초로 주요 국제기구 중 하나인 WHO의 수장을 지낸 고 이종욱 전 사무총장(2006년 5월 사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이 프로그램은 개도국 보건의료 인력을 교육하는 게 목적이다. 개도국 의사, 간호사, 보건 관련 공무원, 질병 연구자, 의공기사 등을 대상으로 3∼12개월간의 교육 과정으로 운영된다.

이수구 KOFIH 총재는 “이종욱 펠로십은 과거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받았던 의료 원조를 다른 개도국에 돌려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한국이 주도하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이며 동시에 한국형 의료인 양성 모델을 세우는 작업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다.

2012년 정부의 보건분야 공적개발원조(ODA) 사업계획 보고서도 이종욱 펠로십을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응용한 한국형 개발 경험 전수 사업’이라고 표현했다.



라오스, 탄자니아, 우즈베크가 가장 많은 연수생 파견


올해로 9년째 운영되는 이종욱 펠로십을 거쳐 갔거나 현재 참여하고 있는 개도국 의료 인력은 총 26개국 455명. 운영 10년째가 될 내년에는 누적 연수생 수가 5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29일 KOFIH에 따르면 이종욱 펠로십에 가장 많은 인력을 파견했던 나라는 라오스(82명)다. 다음으로는 탄자니아(62명), 우즈베키스탄(48명), 스리랑카(38명), 캄보디아와 에티오피아(각 34명), 베트남(21명)의 순이다.

전통적으로 ‘한류 열풍’이 강했던 동남아와 중앙아시아권 나라들이 주류지만 상대적으로 한국 문화에 덜 익숙한 아프리카 국가(탄자니아, 에티오피아)들도 적극적으로 인력을 파견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심각한 전쟁을 겪었던 남수단(9명), 르완다(5명), 아프가니스탄(4명) 등이 연수생을 보냈다는 것도 특징이다.

이형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그동안 한국의 국제원조가 아시아 지역에 집중됐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종욱 펠로십은 ODA의 다양화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 비아시아권 의료인들에 대한 연수 기회를 더 확대한다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브랜드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욱 펠로십 연수생들이 주로 교육받는 기관 중에는 ‘빅5 병원’을 비롯해 국내 정상급 병원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는 것도 장점. 그만큼 수준 높은 의료진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시설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92명), 연세의료원(48명), 가톨릭의료원(42명), 순천향의료원(41명), 인하대의료원(40명) 순으로 많은 인력을 교육했다.

이인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팀장은 “개도국 의료진 교육은 국제사회에 대한 환원 활동이며 동시에 병원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 작업이기도 하다”며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병원의 해외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국 의료기술 벤치마킹에 적극적


이종욱 펠로십 연수생들도 교육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특히 기대했던 것보다 병원 시설이나 의료진 수준이 훨씬 높다는 평가가 많다.

탄자니아 내과 의사 출신으로 유럽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알렉스 마사오 씨(37). 3월부터 세브란스병원에서 연수 중인 그는 “유럽에 비해서도 한국 병원의 인프라나 의사들 실력이 전혀 뒤지지 않는 것 같다”며 “오히려 교육량이나 교육 강도는 더 세다”고 말했다.

탄자니아로 돌아간 뒤 의대 교수가 되기를 희망하는 그는 한국 병원에서 꼭 벤치마킹하고 싶은 것으로 중환자 관리 기준과 디지털 시스템을 꼽는다. 마사오 씨는 “어떤 환자를 중환자실에 입원시키고, 질환별로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해 체계적인 매뉴얼이 마련돼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며 “탄자니아에도 큰 병원들에는 매뉴얼이 있지만 구체성은 많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환자 진료 기록을 컴퓨터로 관리하는 디지털 시스템도 업무 효율성을 크게 높이는 조치로 꼽았다. 캄보디아 산부인과 의사 출신으로 2월부터 인제대 일산백병원에서 연수를 하고 있는 우루엥 씨(46)는 “캄보디아는 프랑스 등 외국에서 공부한 의사와 국내에서만 공부한 의사 간 수준 차가 크다”며 “겨우 수십 년 만에 해외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수준 높은 인력을 국내에서 양성할 수 있게 된 비결이 궁금해 한국을 찾았다”고 말했다. 일본의 대학병원에서도 1년간 연수한 경력이 있는 우루엥 씨는 “산부인과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의 수준 차는 없다”고 강조했다.

캄보디아는 아시아권에서도 상대적으로 산모 사망률이 높은 나라로 꼽힌다. 우루엥 씨는 산모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하는 제왕절개 수술에 특히 관심이 높다. 또 복강경 수술을 이용한 부인과 질환 치료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개도국 의료 발전 이끌어나갈 기회


의료계에서는 최근 국내 주요 병원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이종욱 펠로십, 나아가 다른 개도국 의료진 교육 프로그램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것으로 전망한다. 해외에 한국형 병원이 계속 생기면 국내 의료진의 진출을 통한 현지 의료진 교육과 양성은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료 한류’ 특히 한국형 의료진 양성 모델에 대한 관심도 더욱 커질 수 있다는 말이다.

서울대 의대 강대희 학장은 “한국의 현대의학이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제중원을 통해 발전했듯 먼 훗날 한국 의료진들이 운영하는 병원이 특정 개도국의 스탠더드 병원이 될 수도 있다”며 “한국의 경제나 의료 수준을 감안할 때 전체 의료계가 이에 대한 준비를 진지하게 해야 되는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의 응급의료 체계는 개발도상국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의료보건 시스템 중 하나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제공
한국의 응급의료 체계는 개발도상국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의료보건 시스템 중 하나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제공
▼개도국들 “한국의 건강보험-응급의료체계 배우고 싶어”

한국 의료정책도 인기

“현재 국제기구 내에서 한국의 보건의료 정책, 의료인 양성 시스템에 대해 관심이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지난달 한국을 찾았던 신영수 세계보건기구(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은 “한국이 보건의료 분야에서 새로운 정책이나 제도를 마련할 때마다 국제기구에서 예의주시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국 보건의료 정책의 수준이 그만큼 높고, 이를 배우고 싶어 하는 나라도 많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와 보건의료계에 따르면 최근 국제기구와 개발도상국(개도국)들은 한국의 의료인 교육 및 양성 시스템 못지않게 보건의료 정책과 제도에 대한 벤치마킹에도 적극적이다.

개도국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보건의료 정책으로는 국민 건강보험 제도가 꼽힌다. 비교적 합리적인 비용으로 다양한 계층에게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델로 개도국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에 따르면 이미 오만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 건강보험 제도에 대한 벤치마킹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은 한국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건강보험 제도를 마련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공적개발원조(ODA) 프로그램인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을 통해서도 가나와 에티오피아가 건강보험 제도를 배우고 있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최근에는 건강보험 제도의 약점으로 꼽히는 지역 가입자와 직장 가입자 간 형평성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앞으로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물어오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개도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감염성 질환이나 기초위생 증진과 관련된 정책도 한국형 모델이 각광받고 있다. 결핵 퇴치, 어린이 예방접종, 응급의료체계 구축, 농어촌 보건소 운영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KSP 사업을 통해 △필리핀과 남수단은 결핵 퇴치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어린이 예방접종 △스리랑카는 응급의료체계 구축 △미얀마는 농어촌 보건소 운영과 관련된 한국형 모델을 도입하고 있다.

국제기구의 사회정책 부문에서 동남아 국가들의 도시개발 관련 컨설팅을 담당한 경험이 있는 이모 씨는 “한국의 건강보험 제도와 주요 감염병 예방 정책은 개도국 공무원들의 경우 보건의료 담당이 아니어도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며 “개도국 공무원들이 보건의료 분야에서 한국 출신을 더 많이 뽑을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국제기구 관계자들에게 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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