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공원도 아니고 세계공원이라 안캅니까(하지 않습니까). 꼭 돼야지예. 세계지질공원이 되마(되면) 청송 사과가 더 유명해지겠지예.”
지난달 22일 경북 청송군청에서 열린 ‘청송 세계지질공원 등재 추진 주민공청회’. 회의 막판 마이크를 잡은 심향섭 씨는 묵직한 사투리로 “요새 날이 건조해 산불예방 안내를 마이(많이) 하던데 그럴 때 지질공원 홍보도 같이 좀 하마(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과 농사를 지으면서 주민이 90명가량 되는 청송군 내 한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그는 자신의 동네가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추진한다는 말을 듣고 만사 제쳐놓고 공청회에 참석했다. 사과로 유명한 청송은 열매 솎아내기가 한창인 5월 말 무렵이 1년 중 가장 바쁜 철이다. 심 씨는 “나는 동네 이장만 맡고 있어도 가슴이 벅찬 사람인데, 우리 동네가 세계적인 공원이 될 수도 있다 카이(하니) 심장이 막 벌렁벌렁 한다”고 말했다. 청송군은 11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신청할 계획이다. 웬 지질공원?
국립공원은 들어봤는데…. 지질공원? 그런 게 있었나?
지리산, 설악산, 북한산 같은 국립공원은 귀에 익다. 우리나라 국립공원의 역사는 50년이 다 돼 간다. 지리산 국립공원이 1967년 처음 문을 열었다. 하지만 국가지질공원은 낯설다. 생긴 지 3년이 채 안 된다.
국가지질공원은 6월 현재 모두 6곳. 2012년 12월 울릉도·독도와 제주도가 국가지질공원 인증을 받았고, 그 뒤로 부산(2013년 12월), 청송, 강원평화지역(이상 2014년 4월), 무등산권(2014년 12월)이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환경부는 지질학적으로 의미가 있으면서 경관이 뛰어난 자연유산을 보전하고, 교육·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기 위해 국가지질공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6곳 중 유네스코가 인증한 세계지질공원은 제주도뿐. 제주는 우리나라에 국가지질공원 제도가 도입되기 전인 2010년 10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고, 지난해 재인증을 받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국가지질공원으로 먼저 인증을 받아야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신청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기도 한 제주는 그렇다 치고, 청송은 인구가 2만6000명밖에 되지 않는 ‘깡시골’. 이 중 40%가 넘는 1만1000명가량이 농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그런 청송이 뭐가 있기에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신청하겠다고 나선 걸까.
‘매미’가 찾아 낸 공룡 발자국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는 중생대 마지막 지질시대인 백악기(약 1억4500만∼6500만 년 전)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다. 국내에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된 곳 중 단일 지층으로는 최대 면적(약 2400m²)이다. 이곳에서 육식공룡 발자국 120여 개와 초식공룡 발자국 100여 개가 나왔다.
공룡 발자국은 2003년 9월 한반도를 덮친 태풍 ‘매미’가 찾아냈다. 강한 비바람으로 산사태가 나면서 수천만 년 넘게 땅 밑에 묻혀 있던 공룡 발자국이 드러난 것. 매미가 산자락을 휘저어 공룡 발자국이 드러났지만 당시 신성리 주민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공룡 발자국이란 걸 알게 된 건 매미가 지나간 지 열 달 뒤인 2004년 7월. 당시 경북 포항의 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주변을 지나다 공룡 발자국을 알아봤다고 한다.
1년 가까이 주변을 오가면서도 공룡 발자국을 몰라봤던 신성리 주민들은 “그 큰 공룡들이 저렇게 가파른 산을 걸어 다녔다고?” 하면서 못 믿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공룡이 살던 당시에는 평지였는데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여러 번 지각 변동이 생기면서 지금은 경사지가 됐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주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리 공룡 발자국은 청송 국가지질공원 명소 중 한 곳이다. 화산재가 굳어 깃발바위로
주왕산. 청송에서 가장 이름난 산이다. 이 산 어귀에 7개 봉우리로 이뤄진 절벽 바위 ‘기암단애’가 있다. 청송 국가지질공원 내 명소 중 지질학적 가치와 경관 가치가 가장 높다고 평가받는 곳 중 하나다.
대개 ‘기암’이라고 하면 ‘기이하게 생긴 바위(奇巖)’를 뜻하지만 기암단애의 기암은 그런 뜻이 아니다. 이런 얘기가 전해온다. 중국 당나라 때 진나라 재건을 노리다 실패해 신라로 숨어든 사람이 있었다. 당은 신라에 이 사람을 잡아 달라고 했다. 신라 마일성 장군이 주왕산 굴속에 숨어 있던 도망자를 찾아냈다. 그리고 주왕산에서 가장 돋보이는 봉우리에 깃발을 꽂았다. 그래서 기암(旗巖·깃발바위)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단애(斷崖)는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란 의미다.
기암단애는 화산재가 굳어서 된 응회암 덩어리다. 재가 쌓이고 굳어 산만 한 바위가 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섭씨 800도가 넘는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부스러기 돌들과 함께 엉겨 쌓이다 보면 식어가면서 뭉쳐져 바위가 된다. 청송이 지금은 평온한 분지이지만 중생대(약 2억4500만∼6500만 년 전)에는 화산 폭발이 잦은 곳이었다. 주왕산도 650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생긴 산이다. 청송 8경 No.1 백석탄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에 있는 백석탄(白石灘). 백옥같이 반짝이는 고운 돌들이 많은 개울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청송 8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지난해 열린 국가지질공원 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국내 최고의 지질 명소를 물었을 때도 백석탄이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백석탄은 흰색의 모래 알갱이들이 퇴적되면서 굳은 사암이 오랜 세월 동안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이리 깎이고 저리 파이면서 만들어진 지형이다. 백석탄의 돌들이 하얀색을 띠는 건 백색 광물인 석영이 많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백석탄은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의 바위 봉우리들을 축소해 놓은 듯하다고 해서 ‘미니 알프스’로 불리기도 한다.
백석탄에서는 일명 ‘돌개구멍’으로도 불리는 포트홀(pothole)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포트홀은 물 따라 흘러가던 작은 돌들이 암석의 갈라진 틈이나 오목한 홈 속에 갇힌 뒤 오랜 세월 빙글빙글 돌면서 만든 구멍이다. 퇴적물(모래 알갱이)이 완전히 굳기 전에 그 위를 지나다닌 생물들의 흔적인 생흔화석도 백석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선택과 집중의 고민
공룡 발자국, 기암단애, 백석탄 말고도 청송에는 지질학적으로 의미 있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들이 여럿 있다. 부동면 상의리 주방천 일대 페퍼라이트(peperite)는 화산 분출로 흘러내리던 용암이 진흙이나 갯벌 같은 말랑한 퇴적물과 섞이면서 굳어진 암석이다. 암석 표면이 후추(pepper)를 뿌려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일명 ‘후추암’으로도 불린다. 페퍼라이트가 발견된 지역이라면 그 일대는 아주 오래전 물속에 잠겨 있었거나 습지, 갯벌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왕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주산지는 조선시대에 농업용으로 만들어진 길이 200m, 폭 100m, 수심 8m의 아담한 인공 저수지다. 이 연못은 바닥이 치밀한 조직의 응회암으로 돼 있어 물을 가둬놓는 담수력이 좋다. 수령 150년 이상 된 왕버들 20여 그루가 연못 속에 뿌리를 내린 채 살고 있다. 주산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2003년)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시루봉과 용연폭포가 있는 용추협곡, 급수대 주상절리, 청송얼음골까지…. 청송군은 지질 명소 24곳을 세계지질공원 등재 신청서에 담을 계획이다. 그런데 선택과 집중의 문제가 남아있다. 24곳 전부를 구구절절 설명하면 좋겠지만 그럴 사정이 못된다. 신청서는 50쪽을 넘길 수 없다. 신청서 파일 용량도 10MB(메가바이트) 이하로 제한돼 있다. 쪽수나 용량을 넘긴 신청서는 유네스코가 아예 받지 않는다고 한다. 신청서 작성을 맡은 경북대 장윤득 교수(지질학)는 선택과 집중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상황이다.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관리공단 국가지질공원사무국은 잘된 사례로 꼽히는 다른 나라들의 신청서와 유네스코의 최근 심사기준 트렌드 등을 파악해 청송군에 도움을 주고 있다.
다른 나라는…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지질공원은 32개 나라에 111곳(2014년 9월 기준)이 있다. 대륙별로는 유럽이 64곳으로 가장 많지만 국가별로는 중국이 제일 많다. 전체 세계지질공원의 30% 가까이가 중국에 몰려 있다.
중국은 세계자연유산이기도 한 장자제(張家界)와 화산섬 하이난(海南) 등 31곳을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세계지질공원 브랜드가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중국은 일찌감치 국가 차원에서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산인해안 등 7곳을 세계지질공원으로 갖고 있어 중국 다음으로 많다. 유럽에서는 스페인(10곳) 이탈리아(9곳) 영국(6곳) 등이 많은 세계지질공원을 보유하고 있다.
국가지질공원사무국 황보연 과장은 “청송을 시작으로 매년 한 곳씩 유네스코의 현장평가를 받을 계획”이라며 “2022년까지 국내에 모두 8곳의 세계지질공원을 두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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