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슈퍼컴 4호기, 평창겨울올림픽을 부탁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4일 03시 00분


기상청, 한반도 이상기후에 도전장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 관제실. 10여 개의 컴퓨터 모니터와 전광판에 제4호 슈퍼컴퓨터에서 처리하는 기상 관측 데이터들과 분석 정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시스템을 모니터링하는 기상청 직원들의 손이 분주하다. 오창=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 관제실. 10여 개의 컴퓨터 모니터와 전광판에 제4호 슈퍼컴퓨터에서 처리하는 기상 관측 데이터들과 분석 정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시스템을 모니터링하는 기상청 직원들의 손이 분주하다. 오창=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단군의 아버지 환웅은 바람을 주재하는 풍백(風伯)과 비구름을 통제하는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내려와 세상을 다스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 한 줄은 2000년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기상, 천문의 역사를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처럼 인용된다. 농업 중심의 고대 농경사회에서 하늘을 관측하려는 시도는 다른 어느 것보다 절실했을 터. 선조들의 이런 관심과 노력은 1441년 세계 최초의 측우기 발명으로 이어졌다.

6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한국의 기상과학은 슈퍼컴퓨터와 각종 첨단 장비를 앞세워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조선 당대 최고의 기상강국’이었던 역사를 이어가겠다는 예보관들의 각오는 비장한 수준이다. 한때 잇단 오보로 “예보와 정반대로 하면 맞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던 ‘흑(黑)역사’를 털어내겠다는 것이다.

충북 청주시 오창의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 최근 도입을 완료한 제4호 슈퍼컴퓨터가 설치된 이곳은 국가 주요 보안시설로 분류돼 있다. 슈퍼컴은 본체에 연결된 수백 개의 통신케이블을 통해 전국에서 측정된 기상 데이터들을 속속 빨아들여 처리 및 분석하는 기상청의 ‘심장’ 구실을 한다. 오창=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충북 청주시 오창의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 최근 도입을 완료한 제4호 슈퍼컴퓨터가 설치된 이곳은 국가 주요 보안시설로 분류돼 있다. 슈퍼컴은 본체에 연결된 수백 개의 통신케이블을 통해 전국에서 측정된 기상 데이터들을 속속 빨아들여 처리 및 분석하는 기상청의 ‘심장’ 구실을 한다. 오창=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측우기에서 슈퍼컴까지

충북 청주시 오창 과학산업단지에 자리 잡은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 최근 설치가 완료된 제4호 슈퍼컴퓨터 ‘우리’와 ‘누리’, ‘미리’가 시험 가동 중이다. 제4호 슈퍼컴은 5800TF(테라플롭스·1초당 1조 번의 컴퓨터 연산을 하는 속도)의 연산속도로 데이터 처리 성능을 30배 향상시킬 수 있는 첨단 컴퓨터다. 전국의 측정망에서 관측된 기상 정보들을 빨아들여 처리하는 기상청의 ‘심장’인 셈이다.

“제4호 슈퍼컴의 도입으로 현재 전 세계 23위인 한국 기상 슈퍼컴퓨터의 순위는 순식간에 2, 3번째로 뛰어오를 겁니다. 예보의 정확도를 높여서 국가재난이나 기후변화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고요. 관광 레저산업의 활성화 같은 경제적 이익까지 모두 따지면 슈퍼컴으로 3916억 원의 가치 창출이 가능합니다.” 센터 오하영 주무관의 설명이다.

가격이 600억 원에 이르는 이 슈퍼컴은 가동에 들어가는 에너지도 엄청나서 전기료만 매달 2억5000만 원에 이른다. 115㎡(약 35평) 아파트 7000∼8000가구가 쓰는 월간 전기소비량과 맞먹는 전력을 쓴다는 게 센터의 설명. 컴퓨터에서 나오는 열을 낮추기 위해 바닥 밑을 흐르는 냉각수 장치와 에어컨 등 냉방 장치도 풀가동되고 있었다.

기상청은 지금까지 제3슈퍼컴으로 국내외에서 들어오는 2000만 개의 관측 자료를 분석하고, 일기예보의 판단 근거가 되는 12만 장의 일기도를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처리하는 데이터 양만 매일 신문 1억2000만 페이지 분량. 이런 자료들을 분석해 전 지구를 가로세로 25km 크기의 사각형으로 나눠 기상 예측 결과를 내놨다. 4호기가 내년 상반기(1∼6월)에 본격 가동되면 2019년까지 이 격자의 길이를 12km까지 줄여 더 정교하고 세밀하게 예보할 수 있다는 게 센터의 설명이다. 한반도 내 기상 정보는 1.5km 크기까지 더 선명하게 잘라낸다.

슈퍼컴퓨터센터에서는 컴퓨터실 촬영이 금지돼 있었다. 개별 컴퓨터만 제한적으로 촬영이 허용됐다. “국가 주요 보안시설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이곳은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시설 경비와 보안을 위해 군이 투입되는 시설이기도 하다. 슈퍼컴센터뿐 아니라 기상레이더센터 등 기상청 산하의 시설 대부분도 국가가 관리하는 주요 보안시설로 분류된다.

김태희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장은 “기상 장비나 컴퓨터는 고가의 장비인 데다 군함이나 군용기 운용 같은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며 “생화학전을 할 때 바람이 부는 방향과 기류 등이 중요한 정보라는 점을 감안하면 왜 기상 장비가 보안 대상인지 쉽게 이해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보’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

제4세대 슈퍼컴의 도입으로 예보 정확도는 얼마나 더 좋아질까.

과거 제2, 3호 슈퍼컴퓨터를 도입하고도 예보는 빈번히 빗나간 게 사실이다. 특히 2008년 여름은 기상청 최악의 한 해로 기록돼 있다. 6주 연속 주말예보가 어긋나면서 ‘오보청’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예보관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두려웠다”며 지금도 진저리를 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당시 날씨예보는 물론이고 폭설 태풍 등 기상청이 정보를 제공하는 6개 항목에 대한 국민 평균 만족도는 모두 역대 최하위를 기록했고, 그 과정에서 기상청장이 물러나는 수모를 겪었다. 기상청은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기상 전문가를 영입해 기상선진화추진단을 꾸렸지만,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선진화 사업 이후에도 국민의 신뢰도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를 의식한 듯 기상청 관계자들은 “슈퍼컴퓨터는 매우 빠른 계산기일 뿐 그 자체가 예보 정확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며 다소 신중한 모습이었다. 기상예보의 정확도를 좌우하는 3대 요소는 수치예보 모델의 성능(40%)과 관측자료(32%), 예보관의 능력(28%)이다. 수치 모델의 경우 현재 영국 모델을 쓰고 있지만 땅이 좁고 산이 많은 한반도 지형의 특성을 100%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예보관들은 말한다. 과거 잦은 순환보직 근무 시스템 때문에 예보관의 전문성을 갖추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도 이들의 항변 중 하나다.

이웃나라인 일본과 미국의 예보는 예보관들이 신경증을 보일 정도로 아픈 비교의 대상이다. 미국과 일본 기상청이 예보한 태풍의 진로까지 찾아내 “한국 기상청의 정확도가 제일 떨어진다”며 날을 세우는 국내 전문가들 앞에서 기상청은 매번 곤혹스러움을 맛봐야 했다.

나득균 예보정책과장은 “기상 특성은 나라마다 지형과 위치 등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며 “한국은 지형이 복잡한 데다 예보 대상지역이 작아서 더 힘든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주변국과의 비교 결과에는 “억울하다”는 항변도 나온다. 실제 비 소식을 맞힌 비율 등을 숫자로 따져보면 한국이 더 높았다는 것이다. 기상청의 자체 평가에 따르면 사흘 미만의 단기와 3∼10일 중기예보 정확도는 2009∼2014년 연속으로 한국이 일본보다 더 높았다. 특히 중기예보의 정확도는 차이가 점점 벌어져 지난해의 경우 한국이 83.1%, 일본이 74%였다.

강릉기상레이더센터 전경. 커다란 축구공 모양의 돔 내부에는 대형 기상레이더가 360도 회전하면서 반경 500km 구간의 기상 상황을 24시간 관측하고 있다. 강릉=이정은 기자 lightlee@donga.com
강릉기상레이더센터 전경. 커다란 축구공 모양의 돔 내부에는 대형 기상레이더가 360도 회전하면서 반경 500km 구간의 기상 상황을 24시간 관측하고 있다. 강릉=이정은 기자 lightlee@donga.com
새로운 시험대, 평창

예보가 어렵다는 한국에서도 강원도의 경우 예보관들이 “제대로 맞히기가 정말 까다롭다”며 혀를 내두르는 지역이다. 동서를 가르며 쭉 내리꽂는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동서가 갈려 있고 그 축을 중심으로 동쪽은 해양성 기후, 서쪽은 대륙성 기후로 나뉜 곳. 진부령 한계령 등 높은 산등성이 부근에서는 ‘푄 현상’을 비롯한 기후 현상이 수시로 일어나고 기상 재난 사례도 월등히 많다. 지난해에는 9일 연속 눈이 오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연간 9000만 명의 관광객이 오가는 관광지이기 때문에 날씨 정보에 관한 수요는 어느 지역보다 높다.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는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은 전례 없는 도전이다. 매서운 겨울바람과 눈 폭풍이 몰려오는 겨울 날씨 속에 외부 경기를 진행해야 하는 겨울올림픽에서 기상 정보는 대형 국제행사의 성패를 좌우할 주요 변수. 기상청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평창올림픽 때 예보가 틀리면 끝장”이라는 긴장감이 감돈다.

기상청은 40명의 에이스 예보관들을 뽑아 지원단을 구성하고 훈련에 돌입한 상태다. 강원지방기상청의 이선기 예보과장은 “스키점프 같은 경기는 강풍에 따라 경기 중단 여부를 결정해줘야 하고,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언제 재개 가능한지 등도 예보관이 판단해야 한다”며 “컴퓨터나 기계만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미세한 차이까지 감안해 데이터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축적된 산악 기상의 특별한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기상청은 과거 사례들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앞서 겨울올림픽이 열렸던 러시아 소치로 시찰을 다녀오기도 했다.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로 눈이 점점 줄고 있는 것은 전 세계가 함께 맞닥뜨린 문제. 소치의 경우 3년 치 눈을 매년 깊숙한 계곡 내 이른바 ‘특별보관고’ 7곳에 나눠 저장해 놓기도 했다. 이 과장은 “우리도 이런 ‘눈 은행(snow bank)’의 운영을 포함해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예보 능력의 강화는 겨울올림픽의 일회성 지원을 넘어 강원도 지역의 농업과 축산업 지원 등 다방면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소나 닭은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폭염 혹한 등에 발 빠르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 강릉기상청은 ‘한우사육 기후지수’를 개발해 평창과 횡성, 대관령의 축산업을 지원하고 있다. “제대로 관리된 한우는 고기의 마블링이 변할 정도”라며 현지 기상청 관계자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역경제에도 일조하고 있다는 자부심 묻어나는 미소와 함께.

오창·강릉=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기상청#기상예보#평창올림픽#이상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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