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장수 과학교양 월간지 ‘과학동아’가 30주년을 맞았다. 1986년 1월 창간호 표지(사진) 기사는 76년 만에 지구를 찾은 핼리 혜성이었다. 한국과학기술대(KIT)의 3월 개원 소식도 담겼다. 한국과학기술대는 KAIST의 전신이다. 과학동아와 ‘86학번 동기’로 시작한 KAIST 86학번 3명을 만났다. 이들은 현재 모교인 KAIST 교수로 있다.
지금은 KAIST가 국내 최고의 이공계 대학으로 평가받지만 1986년 개원 당시에는 환경이 열악했다. ‘미국 주립대 수준’이라는 말에 서울 소재 우수 대학을 포기하고 KAIST를 선택한 1학년 학생들은 실망감이 컸다. 이희승 KAIST 화학과 교수는 “공사가 덜 끝나 학교 전체가 공사판이었다”며 “학교에 정이 안 들어 매주 서울 집에 다녀왔다”고 회상했다.
접근성도 떨어졌다. 외딴곳에 대학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어 학교 밖으로 나가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KAIST 1기’라는 책임감이 모든 상황을 버텨내게 했다. 이 교수는 “우리(1기)가 잘못되면 학교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KAIST를 택한 결정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다.
이런 ‘독한’ 면학 분위기는 당시 KAIST 캠퍼스 전체에 퍼져 있었다. 이도헌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는 “한 분야에서 ‘장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전산학 전공인 이 교수는 친구들과 매일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며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전산학과 학생들 사이에서는 손가락에 생긴 굳은살을 보고 프로그래밍 실력을 가늠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교수들도 학생들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그는 “부처님오신날 등 공휴일에도 정상적으로 수업을 했다”며 “1년 중 유일하게 쉬는 날은 어린이날뿐이었다”고 말했다.
KAIST는 첨단 이공계 학과 도입에도 앞장섰다. 산업디자인이 대표적이다. 남택진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당시에는 과학기술대에 디자인학과가 왜 필요하냐는 지적이 나올 만큼 산업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낮았다”고 말했다. 이도헌 교수는 “국내 대학 중에서 KAIST가 처음으로 C언어와 리눅스 프로그래밍을 가르쳤는데, 지금은 초등학교에서도 프로그래밍을 가르칠 만큼 일반화됐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야만 연구를 할 수 있다는 편견도 깼다. 이희승 교수는 “86학번이 KAIST 대학원에 대거 진학하면서 국내 과학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과학동아는 창간 30주년 기념으로 ‘86학번 동기’들을 계속 찾아다닌다. 다음 달에는 서울대 물리학과 86학번들을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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