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지아공대 아쇽 고엘 교수는 올 1월부터 ‘질 왓슨’이라는 인공지능 조교를 이용해 왔다. 질 왓슨은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고 상담을 해주었는데, 학생들은 이 조교의 정체를 몇 달 동안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최근 미국의 대형 로펌 ‘베이커&호스테틀러’는 인공지능 ‘로스’를 변호사로 고용했다. 로스는 고객과 관련한 새로운 판례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인간 변호사의 업무를 돕게 된다. 질 왓슨과 로스는 모두 인공지능 왓슨의 두뇌를 이용한다. 왓슨은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으로 2011년 퀴즈쇼 ‘제퍼디’에서 인간 챔피언들을 물리친 바 있다.
이런 기사가 올 초에 나왔다면 관심을 받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알파고라는 해일(海溢)이 지나간 지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랄 지경일 거다. 요즘은 어딜 가나 알파고 이야기다. 언론매체에도 인공지능에 대한 기사나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 했던가, 사람들은 적(敵)에 대해 알기 원하는 거 같다. 과연 기계가 나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까? 언제쯤 그런 일이 일어날까?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필수라는 지적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시대에 정말 중요한 질문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것이라 생각한다. 인공지능 관련 논란의 홍수 속에서 올바른 대처 방안을 찾는 것은 우선 인간을 정확히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역설적이게도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문학이 더 중요한 이유다.
모 대학에서 강연하는 중에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신학과 과학이 양립할 수 있을까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이 인류에게 준 영향을 이야기한 후 나온 것이다. 성서에서 여호수아가 “태양아. 멈추어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중세 기독교가 천동설을 지지한 이유다.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들이 불에 타 죽은 이유이기도 하다. 진화론은 지금도 기독교의 공격을 받고 있다. 과학자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나는 양립할 수 있다고 답했다.
하나의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대립되는 이론이 있을 때, 이들이 양립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하나의 현상을 두 가지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두 방식은 공존할 수 있다. 과학은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는 방법론이다. 증거가 예측과 다르면 바로 틀렸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이 과학의 진정한 힘이다. 종교가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증명하려 한다면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신학과 과학이 다른 사고방식임을 인정할 때 양립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명제의 참, 거짓을 따지는 데 유용하지만 가치를 판단하는 데 종종 무용지물이다. 꽃이 왜 아름다운지를 설명하는 것은 과학의 능력 밖이다. 이것은 과학적 대상도 아니다.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인문학의 몫이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과학책이었다면, 정의에 대한 이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정의가 무엇인지 말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가치를 판단하는 객관적 기준이란 없기 때문이다. 정의, 사랑, 인권, 아름다움 같은 것을 정의(定義)하거나 왜 중요한지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은 이것들 없이 살 수 없다.
신학은 인간의 역사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도덕과 윤리에 대한 기준은 옳고 그름을 떠나 대부분 신학에서 온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무엇인지 탐구해 왔다. 사실 신학과 인문학이 알아낸 가치의 대부분은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산물이다. 그렇지 않다면 과학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이런 상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상상을 믿는 우리의 능력이야말로 인공지능이 모방하기 힘든 인간만의 특징일지 모른다. 우리가 신을 믿는 것도 그런 능력의 필연적 부산물일 수 있다.
인공지능 조교의 비용이 적게 든다면 대학원생 조교를 해고하는 것이 과학적이다. 대학원생은 다른 수입원을 찾아야 할 거다. 하지만 다른 대안도 가능하다. 인공지능 도입으로 절약된 예산을 대학원생에게 무상으로 주는 거다. 그러면 대학원생은 조교 업무에 낭비할 시간을 아껴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문제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거기서 얻어진 이익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사고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인간은 불행해질 거다. 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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