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소 1층에 걸린 시곗바늘이 9시에 가깝다. 출근길 의사가 등장하자, 대기하던 눈동자들이 일시에 쏠린다. 팬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연예인이 되어 꾸벅 인사하고는, 진료실 의자에 털썩 앉는다. 평균 연령 75세의 고객님들. 이미 사회의 계급장 다 뗀 이분들에겐 ‘안 아픈’ 노년이 최고다.
“늙어 자식들한테 폐 끼치기 싫어서 그려.” 아침이면 1등으로 출근 도장 찍는 순이 할머니는 손자뻘 의사의 칭찬에 입가 합죽이 주름으로 대답한다. 오로지 대기표 1번을 뽑으려고 새벽같이 집에서 나오신단다. “그나마 보건소 댕기니께 이만큼 거동하고 사는 겨.”
“그렇지.” 2번, 옆에 있던 상길 어르신이 거든다. “보건소 없으면 우리 같은 늙은이들 아플 때 갈 데도 없어. 고맙소, 젊은 양반.”
짧은 진료에 똑같은 처방. 매일같이 보는 어르신인데, 새삼스러운 칭찬이 감사하면서도 부끄럽다. 인생의 황혼, 하루하루 아프지 않고 남 도움 없이 거동하는 것이 마지막 자존심인 분들. 문턱 낮은 보건소에 건네는 감사 인사를 빌렸지만, 어르신 스스로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파이팅의 말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딩동. 다음 대기표 환자는 금연 치료 중인 50대 최 사장님. 명퇴 후 시작한 식당 운영이 생각보다 어려워 스트레스가 많다. 담배 끊는 것도 쉽지 않아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인데,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비만도 함께 있어 걱정이다. 식당만 좀 되면 만병이 나을 텐데. “이거 가지고 2층으로 올라가세요.” 간단한 상담 처방 후, 금연 클리닉과 운동 프로그램에 추가로 연결해 드린다.
딩동. “여기 들어가면 되나요?”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며 젊은 친구 하나가 들어온다. “처음 오셨어요? 보건증?” “네. 건강진단서도요.” 방학 때 카페에서 알바 하고, 다음 학기에는 학교 기숙사 들어가려고 제출 서류 준비 중이란다. 휙휙, 매의 눈이 되어 X선을 훑으며, 몇 가지 문진을 한다. “예전에 결핵 앓은 적 있네요?” “네, 고등학교 때요. 6개월 약 먹고 나았어요.” “고생했겠네요. 알바 하면서도 건강관리 잘하세요. 다음 주에 찾으러 오세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보건소에서 진료도 하고, 뭘 되게 많이 하네요?”
“네, 그럼요. 저기 로비 지나면 예방접종실 있어요. 어린 아기들이랑 65세 넘은 어르신들 전염병 예방하려고 주사 맞히는 거예요. 필수 예방접종은 소아과에 가도 되고, 무료예요. 안쪽으로 더 가면 가족보건실이 나와요. 임산부 지원이랑, 난임 부부 지원 상담해 주는 직원들이 있을 거예요. 선천성 질환 의료비랑 저소득층 산모도 지원해 줘요.
한 층 더 올라가면 한방 진료실이랑 물리치료실도 있고, 검사실도 있어요. 에이즈 검사는 익명으로 할 수 있고, 간단한 성병 검사랑 결핵 상담도 할 수 있어요. 전염병이 집단 발병하면 역학조사도 나가고, 방역 소독팀도 있어요.
병의원이나 약국 개설·폐업 신고도 받고, 의료법 위반이나 불편 신고 같은 각종 민원 신고도 받아요. 금연 구역 단속도 하고요. 암 환자 의료비 지원이랑, 저소득층 영양 상태 개선 노력도 해요. 운동 프로그램이랑 건강 교육도 다양하게 하고, 아이들 견학 프로그램도 있죠.
힘들 때 전화하면 정신건강센터에서 도움도 받을 수 있어요. 어르신들 간단한 치매 검사(인지 기능 검사)도 할 수 있고, 치매 보호자나 정신 질환자 가족도 지원해 줘요. 장애인 재활 프로그램도 있고, 가가호호 방문 간호사님들이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 수소문해서 진료 연결도 해 주고요.”
70년 가까운 세월 묵묵히 국가 보건 의료 시스템의 손과 발이 되어 온 보건소다. 진료 말고도 참 하는 일 많은 곳, 더 많아질 곳이다. 어떤 면에서는 부족한 것도 있고, 때론 여론의 질타 대상이기도 하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지역 주민들과 살을 비비는 몇 안 되는 기관이다. 아껴 주자. 응원해 주자. 그리고 보건소는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더 활짝 열린 건강과 소통의 공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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