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를 쏙 빼닮은 갯벌 생물 ‘가재붙이’는 타고난 건축가다. 몸길이 5∼8cm에 불과하지만 갯벌 속 깊숙이 2m 이상 파고들어 가며 총길이 12m를 넘는 복잡한 굴을 만든다. 마치 커다란 지네처럼 보이는 ‘흰이빨참갯지렁이’도 여기 뒤지지 않는다. 갯벌 속 1m 이상을 파고들어 가며 여러 개의 커다란 방을 파 놓는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갯벌 생물의 ‘서식굴’ 형태를 국내 연구진이 밝혀냈다. 구본주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팀은 지난해 7월부터 1년간 변산반도의 곰소만 갯벌, 강화도 갯벌, 낙동강 하구 등 10곳에서 게와 조개, 갯지렁이 등 대형 저서동물(底棲動物) 21종의 서식굴 형태를 조사한 결과를 본보에 처음 공개했다.
연구진은 이 내용을 31일 정식 연구보고서로 발간해 학계에 알릴 계획이다. 그동안 몇몇 저서동물에 대한 소규모 연구는 있었지만, 21종에 이르는 본격적인 연구는 처음이라 국내 갯벌 생태계 파악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개미집만큼 복잡한 서식굴, 국내서 처음 발견
서식굴은 갯벌 생물이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갯벌을 파고들어 가 만드는 집이다. 썰물 때 건조하지 않도록 바닷물을 담는 저장고 역할을 하고, 뜨거운 햇볕이나 천적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피난처 역할도 한다.
서식굴 깊이는 불과 수 cm에서 3m가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 연구진은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서식굴의 내부 구조를 알기 위해 시간이 지나면 굳는 ‘액상수지’를 서식굴 안에 부어 본을 떴다. 그 다음 액상수지가 굳으면 갯벌을 파고 꺼내 연구실로 옮겨와 분석했다.
연구진은 이 실험 결과 우리나라 갯벌에 사는 가재붙이나 흰이빨참갯지렁이 등 일부 생물은 서식굴이 마치 개미굴처럼 크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가재붙이의 서식굴은 내부 구조가 미로 같다. 굴의 전체 길이는 5∼12m, 부피는 4∼18L에 이른다. 집의 크기가 몸의 3000배 이상으로 커 사람으로 치면 초대형 저택에 사는 셈이다. 물속의 유기물을 걸러 먹기 위해 굴 안에 바닷물을 많이 끌어들이려는 행동이다.
반면 흰이빨참갯지렁이는 서식굴 곳곳에 큰 방을 만든다. 환형동물(環形動物)은 굴속에서 몸을 회전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몸길이 1m 이상에 굵기가 어른 손가락만 한 흰이빨참갯지렁이는 집 안에서 뱀처럼 똬리를 틀고 고개만 밖으로 내밀어 먹이를 찾는다. 새 같은 천적의 습격을 피하려고 집을 방공호처럼 이용하는 것이다.
구 연구원은 “가재붙이의 서식굴에 액상수지 몇 통을 들이부어도 끝없이 들어가서 처음엔 다른 곳으로 새는 줄 알았다”면서 “액상수지가 굳은 후에는 갯벌 진흙을 2m 이상 파헤치기 어려워 결국엔 굴착기를 불렀다”고 말했다.
○ 갯벌 생물별 습성이 서식굴 구조 결정
연구 결과 서식굴의 형태나 크기는 동물들의 생태에 따라 달라졌다. 갯벌 흙에서 유기물을 걸러 먹는 생물은 집이 일자나 알파벳 J자 형이 많다. 농게, 엽낭게 등이 이런 형태의 서식굴을 짓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물일 때 잠깐 들어가 썰물 때까지 숨어있을 공간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바닷물에서 유기물을 걸러 먹는 쏙, 개불 등은 바닷물의 순환이 잘되게 하기 위해 두 개 이상의 출입구를 뚫어 U자나 Y자 형태의 서식굴을 주로 만들었다.
구 연구원은 “이번 연구를 통해 갯벌 안에 거대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면서 “앞으로 800여 종에 이르는 국내 주요 갯벌 생물에 대해 추가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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