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논문으로 써서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 논문으로 써야 다른 과학자들이 심사를 하고 학술지에 정식으로 출판돼 세상에 알려질 수 있다. 젊은 과학자들은 연구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매년 다른 사람이 쓴 논문을 수없이 읽는다.
그런데 이 논문을 보는 값이 상당히 비싸다. 세계적인 학술지의 경우 논문 한 편을 내려 받는 데 3만∼5만 원이 든다. 해외 논문을 주로 봐야 하는 이공계열에선 구독료 문제가 심각하다. 학술지를 만드는 출판사와 정액 계약을 맺고 논문을 보고 있는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도서관에서도 “매년 구독료가 올라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했다”고 토로한다.
반대로 학술지를 만들고 유통하는 출판사는 상당한 수익을 낸다. 빈센트 라리비에르 캐나다 몬트리올대 도서정보과학과 교수가 작년 6월 ‘미국공공과학도서관 온라인학술지(PLoS ONE·플로스원)’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013년 기준 국제과학논문 출판시장이 약 100억 달러(약 11조2000억 원)에 이르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은 5개 초대형 출판사가 차지한다. 대형 출판사들의 최근 수년 새 이익률은 30∼40%에 이른다. 구글, 애플 등 첨단 정보기술(IT) 기업의 수익률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덕환 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는 “국가에서 투자해 얻은 결과물을 출판사의 영리 목적으로 활용되도록 만들어 주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서정욱 서울대 의대 병리학과 교수(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이사장)가 주도해 7월 발표한 ‘서울대학교의 오픈 액세스 정책 수립에 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대 교수와 학생 547명 중 284명(52%)이 “국가 연구비로 수행한 과학논문은 무료로 공개해야 한다”고 답했다. ‘구독료 줄이자’ 컨소시엄 꾸려 공동구매 나서
법적으로 출판사의 권리를 인정해야만 한다면, 그 대안으로 ‘공동구매’ 효과를 노리는 경우도 많다. 대학이나 연구기관이 모여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협상을 통해 값비싼 논문 구독료를 할인된 가격으로 보려는 시도다. 이 경우 소속 기관의 이공계 과학자 대부분은 무료로 논문에 접근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실제로 논문 구매시장에서 ‘공룡’ 출판사에 맞서기 위해 ‘개미’들이 힘을 합쳐 공동 대응하는 건 세계적인 흐름이다. 도서관들도 논문 공동구매 폴랫폼인 ‘컨소시엄’을 짜서 가격협상력을 키운다. 현재 세계적으로 177개 도서관 컨소시엄이 있다. 서 교수는 “학술시장은 독과점 시장에 가깝기 때문에 소비자인 도서관이 개별적으로 구독료를 협상해선 대형 출판사에 끌려다니기 쉽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컨소시엄을 공공기관이 주도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케슬리(KESLI) 컨소시엄과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컨소시엄이 대표적이다. 이 둘은 기획재정부 결정에 따라 협상력 강화와 비용 절감 목적으로 내년 1월 1일부터 케슬리 컨소시엄으로 단일화할 계획이다.
케슬리 컨소시엄에는 대학 도서관, 연구소와 민간기업 도서관, 병원 도서관 등 610개 기관이 들어와 집단으로 유통업체인 출판사와 가격협상을 벌인다. 공동구매인 만큼 개별 협상을 할 때보다 할인율이 크다. 여러 기관이 구독 중인 저널을 서로 바꿔 볼 수 있는 공동 활용 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실제 컨소시엄 이전인 1999년에는 각 기관이 학술지를 평균 208종 구독했었는데, 컨소시엄 이후 구독 가능한 학술지가 꾸준히 증가해 2016년 2564종에 이르고 있다. 이용하는 정보량이 12배로 증가한 셈이다. KISTI는 매년 케슬리 컨소시엄에 참가하는 기관들이 8000억 원에 이르는 비용절감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밖에 과거 논문을 사서 무료로 유통하는 업무나, 연구자 및 연구논문에 대한 메타데이터를 분석하는 업무도 하고 있다.
윤정선 KISTI 과학기술정보센터장은 “한정된 예산으로 합리적인 논문 구독을 할 수 있도록 한 새로운 정보분석 서비스도 제공할 계획”이라며 “논문 과월호를 케슬리 참가 기관에 무료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무료 논문 통합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서비스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어떤 학술지를 얼마나 보는지 데이터베이스를 마련하고 분석해야 불필요한 비용 부담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며 “공공기관이 참여해 이 같은 역할을 하는 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논문 무료로 보자… ‘오픈 액세스’ 운동 각광
최근엔 ‘오픈 액세스(open access)’ 형태로 논문 구독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이 운동은 논문에 누구든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으며 2006년 미국의 도서관들이 연합해 만든 학술지 ‘플로스원’이 출범하면서 본격화했다. 구독료를 없애는 대신 출판비용만 논문 생산자인 과학자들이 내는 방식이다. 일종의 ‘투고료’인 셈인데, 편당 180달러(약 20만 원) 수준으로 책정돼 있다. 미국과 영국 정부 등에서 공적자금이 투입된 논문을 오픈 액세스 학술지에 출판하기를 장려하면서 플로스원에 논문을 출판하는 과학자도 늘었다. 현재 한 해 약 3만 편에 이르는 논문이 플로스원에 실린다. 그 뒤를 따라 오픈 액세스 학술지가 1000개 이상 새로 생겨나기도 했다.
다만 현재로선 효과가 제한적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는 구독료를 받고 있는 전통적인 우수 학술지에 논문을 내 성과를 인정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오픈 액세스 학술지 수도 전체의 10%대를 넘지 못하고 수년째 정체된 상태다.
이에 구독료를 받던 기존 학술지의 논문 구독료를 철폐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 같은 흐름은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에서 시작됐다. 2014년 1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중심이 돼 시작한 국제협력 프로젝트 ‘스콥3(SCOAP3)’가 그 사례다. 유료로 발행되던 학술지 10종의 구독료를 없애기 위해 47개국 3000여 개 기관이 참여했다. 각국과 기관은 소속 과학자들이 발표한 논문 편수를 계산해 투고료를 분담한다. 한국에 배당된 국가분담 비율은 2016년 현재 전체 투고료의 1.8%로 9만9000유로(약 1억2375만 원)다. KISTI 등에서 비용을 분담한다. 지금까지 연구자 1만8000명의 논문 1만 건이 스콥3로 무료 공개됐다.
박인규 서울시립대 물리학과 교수는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에선 과거부터 국경 없이 공동연구를 많이 해 다들 ‘지식은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스콥3가 도입된 후 과거보다 논문을 읽고 공유하는 게 쉬워져 연구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스콥3가 물리학 분야에 국한된 운동이었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모든 과학 분야로 확장하자는 움직임도 거세다. 작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결의된 국제협력 프로젝트 ‘오픈 액세스 2020(OA 2020)’이다. 과학 분야 최상위 학술지인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학술지의 90%를 오픈 액세스로 전환하자는 계획이다. 서 교수는 “현재 전 세계가 출판사에 구독료로 지불하는 비용을 한꺼번에 투고료로 전환하면 충분히 모든 학술지를 오픈 액세스로 바꿀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대전환을 위해선 국제 협력이 필수적이다. 3월 21일부터 8월 31일까지 한국, 미국, 일본,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 21개국 64개 컨소시엄이 OA 2020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현재도 빠른 속도로 참가국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한국에선 KISTI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등이 참여하고 있다. 구체적인 비용 분담은 2017년 초 베를린에서 열릴 후속 회의에서 결정될 예정이다.
▼ 출판사 해킹해 논문 무료 공개하는 사이트까지 등장 ▼
28세 대표 “주요 논문 1억건 모두 올리는 게 나의 목표… 지식 공유하자는 게 나쁜 일인가”
논문 열람 값이 비싸다 보니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논문을 무료로 공개하는 ‘지식 해적질’도 등장하고 있다. 2011년 9월 5일 생긴 ‘사이허브(Sci-Hub)’가 대표적인 사례다.
사이허브는 출판사를 해킹해 논문을 빼낸 뒤, 이를 무료 공개하는 웹사이트로 올해 28세인 카자흐스탄 출신 컴퓨터과학자 알렉산드라 엘바키얀이 만들었다. 현재 하루 평균 8만 명이 이용하고 있으며 논문 5800만 건을 보유하고 있다.
엘바키얀은 동아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전 세계 주요 논문이 7000만 건에서 1억2000만 건으로 추정되는데, 이 논문을 모두 사이허브에 담는 게 목표”라며 “비트코인(가상 화폐) 후원금이 매달 수천 달러 이상 들어와 서버 유지 비용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과학저널 ‘사이언스’는 작년 9월부터 6개월간 사이허브에서 논문을 내려받은 나라를 조사해 올해 4월 기사로 발표했는데, 이란 중국 인도 러시아 등을 비롯해 개발도상국이 가장 많이 내려받았다. 이 기간 총 다운로드 건수는 2800만 건에 달했다. 논문을 받은 국가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34개국도 전부 포함돼 있었다. 한국도 서울에서만 12만5000건 이상 논문을 내려받았다.
사이허브는 ‘가난한 과학자들의 지식 접근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OECD 소속 선진국에서도 많이 내려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엘바키얀은 “연구논문이 개발도상국에서만 접근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건 실수”라며 “미국에서도 많은 대학이 상당한 양의 논문 구독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독립 연구자나 일반인은 과학논문 접근 자체가 아예 배제돼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사이언스’가 5월 6일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을 때 응답자 1만1000명 중 88%는 “사이허브가 해적질한 논문을 내려받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사이허브를 이용하는 이유로 51%는 “논문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라고 대답했고, 23%는 “출판사들이 이득을 얻는 데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논문 해적질’은 사이허브가 처음이 아니다. 2004년 문을 연 웹사이트 ‘라이브러리닷엔유’(Library.nu)는 전자 학술서적 40만여 권을 불법 공유하다 출판사 17곳으로부터 집단소송을 당해 2012년 폐쇄됐다. 2011년 미국 하버드대 학생 애런 슈워츠는 학술논문 무료공개 운동의 일환으로 유료 논문 480만 건을 해킹해 파일공유 웹사이트에 올리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검찰은 징역 50년에 벌금 100만 달러를 적용해 기소했고 슈워츠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2013년 자살했다.
사이허브도 작년 6월 출판사 ‘엘스비어’가 뉴욕지방법원에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해 운영하던 사이트가 한 차례 폐쇄된 바 있다. 현재는 새로운 사이트를 개설해 운영 중이다. 엘바키얀은 이 같은 위협에 대해 “2013년 기부금을 받던 온라인 계좌가 정지됐을 때는 매우 두려웠지만 그 뒤로 한 번도 두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면서 “사이허브를 시작한 일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 러시아에 머물고 있는 그는 “당면 과제는 사이허브 운영을 합법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지식 공유가 불법이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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