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한]우울증은 마음의 결핵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9일 03시 00분


이진한 정책사회부차장·의사
이진한 정책사회부차장·의사
롯데그룹 2인자 이인원 부회장 자살, 코리아나호텔 사장 부인 투신자살, 안산 집단 가스 자살, 야구해설가 하일성 씨 자살 등…. 요 며칠 사이 이유는 달랐지만 또 소중한 생명들이 허무하게 스러졌다. 자살은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찾아온다.

생명의 귀중함과 자살 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제정된 자살 예방의 날(9월 10일)을 하루 앞두고 있지만 스스로 이 세상과 작별하는 사람들의 수는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매년 평균 약 1만4000명(2014년 1만3836명)이 목숨을 끊는다. 한 해 교통사고 사망자(2014년 4762명)의 3배에 이를 정도다. 국내 자살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2년 동안 연속 1위다. 인구도 줄고 있는 마당에 자살자 수가 여전하니 너무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다.

자살을 줄이는 주요한 방법 중 하나는 자살의 주원인인 우울증을 조기에 치료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우울증 환자의 의사 상담률은 15%에 불과하다. 실제로 치료받는 사람은 더 적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선진국에서는 정신건강의학과 상담료가 너무 비싸서 방문을 꺼리지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치료 비용에도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편견 때문에 우울증 치료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불편해한다. 정신건강의학과는 비밀을 보장받고 누구나 방문해서 상담을 받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인데도 마치 멀쩡한 이들을 미친 사람으로 만들고 인권을 탄압하는 곳처럼 각인돼 있다.

세상이 바뀌어서 요즘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말하곤 한다. 고칠 수 있는 병이라는 선한 뜻이지만 사실 자살률을 줄이고 편견을 없애려면 우선 이런 표현부터 바꿔야 한다. 우울증을 정말 감기처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감기에 빗댄 이유는 감기처럼 누구에게나 흔하게 오는 질환이라는 의미인데 의외로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낫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우울증이 악화되는데도 병원을 안 간다. 우울증은 자신의 의지가 약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뇌 속에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종의 ‘호르몬 결핍증’이다. 따라서 부족해진 세로토닌을 약으로 보충하면 대개 가벼운 우울증은 치료가 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우울증은 마음의 결핵’이란 표현으로 바꾸자고 말한다. 우울증과 결핵은 치료 과정이나 결과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이나 결핵은 방치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 또 두 질환은 치료제가 확실히 있기 때문에 제때 치료하면 대부분 회복된다. 만약 충분한 기간 치료하지 않고 중단하면 재발하기 쉽다.

하지만 아무리 이야기해도 본인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우울한 증세가 2주 이상 지속되는데 편견 때문에 정신건강의학과에 가기가 부담스러운가? 꼭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만 만나야 된다는 편견도 없애자. 가벼운 우울증은 내과 신경과 가정의학과 등 주변 동네의원에 가도 약 처방이 가능하다. 물론 다각적으로 접근하는 정신건강의학과가 더 낫지만 차선책으로 평소 잘 알고 신뢰하는 의사를 찾아가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다만 효과 좋은 우울증 약(SSRI 계통)은 비정신건강의학과로 가면 보험 혜택이 60일로 제한돼 있다. 60일 제한은 15년 전 당시 정부가 고가의 우울증 약 처방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지금은 약값이 저렴해졌고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규정인 만큼 풀어야 된다. 그 대신 비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진료하는 환자 중 치료가 힘든 우울증 환자라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와 협력할 수 있는 시스템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나온 수많은 정부 대책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자살자 수가 여전히 줄지 않는 것은 분명 정책에도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이진한 정책사회부차장·의사 likeday@donga.com
#우울증#자살#병원#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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