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채경이(가명·15)의 휴지통에서 공책 여러 권이 찢어진 채 발견됐을 때 주부 박모 씨(43)는 그 무섭다는 ‘중2병’이 조금 늦게 찾아온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딸이 끼니를 자주 거르고 자살한 연예인에 대해 ‘죽으면 편할까’ 등의 이야기까지 하게 되자 박 씨는 딸과 함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채경 양은 소아청소년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한국 청소년(10∼19세)의 1995∼2012년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남성 5.6명, 여성 4.4명이었다. 남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6.2명)보다 약간 적지만 여성은 뉴질랜드(5.7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통계청의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청소년 10명 중 1명은 지난 한 해 동안 한 번 이상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이유로는 성적 및 진학 문제(39.2%), 가정 불화(16.9%), 경제적 어려움(16.7%) 등이 꼽혔다.
청소년은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고 표현하는 게 미숙해 성인 우울증에 비해 증상을 주변 사람이 눈치 채기 어렵다. 스마트폰·게임 중독이나 사춘기의 급격한 기분 변화 등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아 ‘가면(假面)우울증’이라고도 한다.
자녀가 평소와 달리 과격한 말과 행동을 하거나 별다른 이유 없이 몸이 아프다고 하면 우울증을 의심해 보는 게 좋다. 사소한 실수에 ‘죄송하다’는 말을 자주 하거나 죽음과 외로움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경고 표시’ 중 하나다.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처벌 망상’이나 주변에서 벌어진 일을 과도하게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로 해석하는 ‘관계 망상’은 우울증이 심한 정도에 이르렀다는 신호일 수 있다. 이럴 때 덩달아 자녀에게 짜증을 내거나 야단을 치면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청소년 우울증과 관련된 가장 잘못된 믿음은 ‘우울감에 대해 얘기하면 증상이 더 나빠지기 때문에 사춘기와 함께 자연히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낫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두뇌의 신경전달물질과 관련된 질환이다. 적절히 치료받지 않으면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지속되다 극단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
친구나 가족과 우울한 감정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우울증을 극복하는 첫 단계다. 증상이 지속되면 꼭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 정식으로 검사를 받아야 하고, 일상생활이나 학업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각해지면 항우울제 복용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족 등 주변 사람이 청소년과 함께 우울증이 생각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공부하고 치료를 잘 받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주는 게 중요하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서울시교육청, 중앙자살예방센터와 함께 청소년 예방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미술치료와 연극치료, 생명존중 연극 관람엔 4428명이 참가했고, 우울증 위험을 조기에 진단하기 위한 교우관계검사는 5199명이 받았다. 자살 예방과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초등학생을 상대로 실시하는 인성 교육엔 1만2780명이 참여했다. 재단 관계자는 “지난 2주 동안 슬프거나 화나는 기분이 지속되는 등 우울증 의심 증상에 시달렸다면 중앙자살예방센터(02-2203-0053)나 정신건강위기 상담전화(1577-0199)로 전화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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