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 교수의 과학 에세이]스마트폰을 든 21세기의 전근대인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김상욱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계몽주의란 17, 18세기 유럽에서 나타난 사상운동이다. 당시 유럽은 종교의 권위가 무너지고 신분제의 모순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계몽주의에서는 신이 아니라 이성(理性)이 핵심이다. 계몽주의의 믿음은 이렇다. 인간은 이성의 도움으로 자연의 본질을 밝히고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며 진보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성을 갖고 있다. 특권을 철폐하고 독재로부터 개인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이성을 가진 모든 개인 역시 중요하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벤담은 이로부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법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자유와 평등의 계몽주의적 기초를 엿볼 수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전통과 특권이 만들어 낸 무지를 악의 근원이라 생각했다. 중세 기독교가 여기에 해당된다. 지구가 돈다는 합리적인 말을 해도 교회의 전통에 어긋나면 불태워 죽이는 것 말이다. 특권은 바로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는 신분제를 말한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런 무지를 몰아내고 이성과 과학이 승리하면 인간은 행복해질 거라 믿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루소 같은 철학자는 오히려 문명으로부터 악이 기원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칸트에 이르는 철학사조는 모든 것을 과학화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며 종교와 도덕을 옹호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계몽주의 시대의 자유주의는 상위 중산계급의 이데올로기였다. 바로 부르주아의 자유였던 거다. 계몽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에 토대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19세기 들어 다윈의 진화론이 계몽주의와 잘못 결합하면서 인종주의나 우생학과 같은 끔찍한 역사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서구 지식인 사회는 계몽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오늘 왜 계몽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지 의아할 수도 있으리라. 안타깝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계몽주의가 필요한 단계인 것 같아서 그렇다. 계몽주의의 핵심인 이성적이고 합리적 사고가 이 땅에서 실종된 지는 오래되었다. 계몽주의가 악으로 규정했던 전통과 특권이 여전히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우리가 남이냐’며 눈 감아주는 것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지요, 악이다. 세상을 맘대로 주무른 비선 실세들의 머릿속에는 17세기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이 가졌을 법한 특권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갑질’ 논란은 듣기 지겨울 정도다. 이는 특권의식이 우리 사회의 모세혈관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의 비합리성은 또 어떤가. 천안함 침몰, 세월호 참사 등의 진상 규명을 위한 합리적 의문에는 ‘종북’이란 딱지가 붙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제대로 된 국가에서 보기 힘든 제도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행 검정교과서를 비판하며 했던 말은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초등학생의 말에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준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일까.

　개성공단은 졸속으로 폐쇄되었고, 이조차 합리적 이유가 아니라 비선 실세의 농간일지 모른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외교부는 한일 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이슈인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피해자들과 상의도 없이 굴욕적 협정을 맺고서 그 내용을 은폐하기에 바쁘다. 집권당은 테러방지법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야당 의원들의 필사적인 저지 노력에도 눈 하나 까딱 안 하고 통과시켰다. 보수정권이 난데없이 제시했던 수많은 복지 관련 대선 공약(公約)들이 공약(空約)이 된 것은 이제 뉴스거리도 아니다. 지난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지 못했으면 우리는 지금 더한 꼴을 보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성이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이다.

　계몽주의 이전의 사회를 전근대사회라 부른다. 근대화는 물질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성과 합리가 없는 사회는 아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최신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인공지능에 대해 떠들어대는 21세기의 ‘전근대인’인지도 모른다. 실상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언론에서 말하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우리는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국가에서 사는 거니까.

김상욱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