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자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에 ‘올눌제(올눌臍)는 지금 강원 평해군에서 나는데, 아주 귀해 구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어디에 쓰는 것인지를 몰랐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로 중국 장수들이 나와서는 이것을 구하는 자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요동의 장관들이 자문(咨文)을 보내 요구하는 자가 줄을 이어 폐단이 많았다’라고 쓰여 있다.
올눌제는 정력제로 잘 알려진 해구신, 물개의 성기다. 한방약물학인 본초강목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해구신은 신라국 바다에 사는 개의 성기다. 그것이 배꼽에 부착된 채로 채취되기 때문에 올눌제라고 한다.’ 세종실록에도 강원도에서 나는 약물로 해구신이 기록된 것을 보면 강원도 앞바다에 물개가 많이 살았을 것이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해구신 이야기가 나온다. 성종 13년에는 일본 사신에게 토산물로 선물했고 광해군 7년에는 요동에서 명나라 사신이 왔는데 물개의 배꼽을 구한다는 서신을 가지고 왔다. 광해군은 “이들이 구하는 물개의 배꼽을 진짜로 잘 가려서 보내주고, 나중에 이들이 검열해서 다시 보내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인조도 마찬가지였다. 인조 3년 6월 명나라의 사신들은 해구신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심지어 “급히 강원도와 함경도 등의 감사에게 명령해 각각 26개씩을 밤낮을 가리지 말고 처소에 보내 달라”고 채근한다. 명나라 사신들은 자국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해구신을 가짜라고 퇴짜를 놓으면서 더 요구해 조선 조정을 괴롭혔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도 조공으로 가장 강력하게 요구한 게 해구신이다.
인조 이후 역사적 기록에서 해구신의 언급은 사라졌다. 아마 물개가 심하게 남획돼 멸종된 것은 아닐까. 흥미로운 점은 왕실 여성의 출산력이 인조 이후 급격하게 떨어졌다는 점이다. 태종 세종 성종 중종 선조와 같은 왕들은 자녀가 20∼29명에 이르렀으나 인조 이후에는 4∼14명으로 줄었다. 억측이지만 해구신이 자취를 감춘 것과 왕실의 낮은 출산력이 묘하게 겹친다.
가끔 해구신을 가져와 진위를 구별해 달라는 환자들이 있다. 대부분이 사슴 생식기나 소의 힘줄을 급조해 만든 가짜다. 옛날에도 가짜는 많이 성행한 듯하다. 본초강목엔 ‘수오룡이라는 짐승을 포획해 유통한다’고 지적했다. 진짜를 구별하는 방법은 약물의 본질에 대한 설명에 담겨 있다. ‘한겨울 가장 찬 물속에 담가도 얼지 않아야 진품’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구신의 본성이 그만큼 뜨겁다는 것이다. 중약대사전에는 ‘물개의 기름을 짜서 동상 걸린 부위에 바르면 금방 나을 만큼 찬 기운을 잘 이긴다’고 설명한다. 현대인이 말하는 스태미나가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양기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구신의 약효 또한 그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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