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 유명 종합병원 입원 병동. 그곳엔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도 아닌 모호한 신분의 의료진이 있다. 이른바 전담간호사로 불리는 ‘PA(Physician Assistant·의사 보조 인력)’다. 간호사 면허증을 갖고 있으면서 의사 대신 환자에 대한 간단한 처치나 처방은 물론이고 의사의 처방을 가끔 바꾸는 역할도 한다.
권역응급센터로 지정된 한 지방 대학병원 응급실에도 PA가 근무한다. 그는 응급실로 실려 온 응급 환자의 초진을 본 뒤 교수에게 보고하고 그 교수의 아이디(ID)로 처방까지 내린다. 일부 병원에서는 PA가 의사 대신 수술을 직접 집도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명백한 불법 의료행위다. 해당 병원에선 의사와 전공의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지만, 병원 경영상 비용 문제와 무관치 않다는 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같은 불법 의료행위를 일삼는 PA를 고용한 병원은 얼마나 될까.
동아일보 디지털미디어 ‘매거진 D’와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회장 기동훈)가 공동으로 지난해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전국 121개 수련병원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1만5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응답자 3063명, 응답률 20%)를 실시했다.
고려대 통계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비교분석 대상으로 선별한 66개 병원 중 불법 PA를 고용하지 않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또 모든 병원에서 PA가 의사만 할 수 있는 처치나 약 처방을 직접 하는 것이 목격됐다.
분석 대상 66개 병원 중 52개 병원에서 PA가 의사 대신 수술을 직접 집도한 것을 봤다는 응답자가 나왔다. 특히 유경험 응답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Y병원(41.7%)이었고 K병원(24.1%), E병원(22.2%), S병원(21.7%) 등의 순이었다.
전공의 수가 500명 이상인 초대형 종합병원으로, 이른바 ‘빅5’로 불리는 삼성서울병원과 서울아산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서울대병원, 가톨릭중앙의료원 등도 예외가 아니다. 가톨릭중앙의료원을 제외한 나머지 4곳에서 PA가 의사 대신 수술을 직접 집도하는 것을 봤다는 응답자가 나왔다.
대부분의 병원에선 PA가 의사 대신 수술을 직접 집도하는 것 자체에 대해 “처음 듣는 이야기”라거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PA를 고용한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했다. 한 병원 관계자는 “전공의가 담당해야 할 환자가 너무 많아 PA 인력 고용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면서 “전공의의 주당 근무시간을 80시간 이하로 제한하는 ‘전공의 특별법’ 시행 이후 더 많은 PA가 필요해진 실정”이라고 말했다.
전공의 성추행·폭력 대부분 병원서 자행
이번 설문조사 분석 결과 대부분의 병원에서 전공의를 상대로 한 성추행이나 폭력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설문 대상 병원에서 교수 또는 상급 전공의에게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한 전공의는 무려 31.2%나 됐다. 전공의 10명 중 3명 이상이 폭력 경험이 있다는 이야기다.
유경험 응답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A병원으로 절반 이상(58.6%)이 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고 B병원(57.9%)과 C병원(54.8%), D병원(50%) 등에서도 폭력 유경험자가 응답자의 절반을 넘었다. 폭력 경험자가 없는 병원은 없었다.
‘교수 또는 상급 전공의에게 불쾌한 성희롱 또는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66개 병원 중 57개 병원에서 236명이 ‘그렇다’라고 답했다. 이는 전체 응답자의 8.1%에 해당한다. 폭력을 경험했다는 응답자보다는 적지만, 상당수 병원에서 성추행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기동훈 대전협 회장은 “전공의들이 노동기준법이 무색할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데다 의료계에 과거 도제식 구습과 타성이 남아 있어 성추행과 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 같다”면서 “이런 현상이 사라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 그리고 단호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련환경 1위 가톨릭중앙의료원, 만족도 1위 서울아산병원
그렇다면 국내 병원 중 전공의 수련 환경이 가장 좋은 곳은 어디일까. 전공의 수를 기준으로 나눈 병원 규모별 비교 분석 결과 ‘빅5’ 중에서는 가톨릭중앙의료원이 전공의들로부터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어 서울아산병원과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중대형 종합병원(전공의 200∼499명)에서는 건국대병원이, 중소형 종합병원(100∼199명)에서는 단국대병원이, 소형 종합병원(100명 미만)에서는 춘천성심병원이 각각 1위를 차지했다.
수련환경은 전공의 근무시간과 휴식시간, 급여, 수당, 담당 환자 수 등 객관적 지표와 성희롱이나 성추행 경험, 언어·신체적 폭력 경험, 불법 PA 유무 등 업무 환경을 주요 항목으로 평가했다.
수련환경 평가지표에 대한 전공의들의 주관적 평가를 수치화한 ‘수련환경 만족도’ 조사에서는 서울아산병원이 ‘빅5’ 중 1위를 차지했다. 중대형 종합병원에서는 부산대병원이, 중소형 종합병원에서는 분당서울대병원이, 소형 종합병원에서는 춘천성심병원이 소속 전공의들로부터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공의 수련환경 평가와 만족도 조사는 전공의가 주로 근무하는 응급실과 입원실 등 해당 병원의 의료서비스 질을 평가하는 주요 척도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기 회장은 “전공의만큼 병원 내부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면서 “병원에 대한 외부의 평가보다 내부 전공의들의 평가가 환자들이 의료기관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설문조사는 강청희 전 대한의사협회 부회장과 이용민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장, 임인석 중앙대 교수, 대전협 이사진, 고려대 통계연구소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전공의 수련환경조사 평가위원회’에서 문항별 가중치를 조정해 조사의 신뢰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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