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이 갈라서는 병원, 그 갈림길에서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의사의 삶은 너무나 매력적인 이야깃거리다. ‘종합병원’(1994년), ‘하얀 거탑’(2007년), ‘낭만닥터 김사부’(2017년)까지. 의학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 국내에서 그런 의사들의 삶을 그림으로 형상화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의학 만화는 아직 없었다. 그래서 나선 이들이 있다. ‘의생명과학 만화 연구회’ 회원들이다. 해부학 교수, 갓 군의관 복무를 마친 의사부터 전문 만화가, 의사 출신 벤처기업 대표까지. 직업과 나이는 제각각이지만 의학 만화를 그리는 이유는 같다. “어려운 의학 정보를 일반인에게 쉽게 전달하는 데 만화만 한 게 없습니다.” 만화를 사랑하는 의사와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해부학 만화 그리는 ‘싸이’가 되고 싶다”
“제 그림이 많이 형편없죠. 그림을 배운 적이 없거든요.”
의생명과학 만화 연구회 회장인 정민석 아주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56)는 자신의 만화를 소개할 때 이렇게 말한다. 괜한 말이 아니다. 그의 그림 솜씨는 어린아이 수준이다. 하지만 기교가 없다 보니 그림 속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하다. 서너 가닥밖에 남지 않은 머리카락. 50대 중반인데도 장난기 가득한 표정까지. 정 교수가 올 2월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만화 주인공 ‘몸 지킬 박사’는 누가 봐도 정 교수를 똑 닮았다.
정 교수의 만화 인생은 올해로 17년째다. 학생들에게 해부학을 가르칠 때 쉽게 설명하고자 칠판에 그림을 그리던 게 계기였다. 우주만큼이나 복잡한 인체를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림이 백 마디 말보다 효과적이었다.
‘이왕이면 만화를 그려볼까.’ 어릴 적 만화를 좋아하고 놀기 좋아했던 정 교수의 엉뚱함이 꿈틀댔다. 그는 의대 동기보다 졸업이 1년 늦었다. “공부를 안 해서 낙제를 한 번 했습니다. 낙제 한 번 한 게 다행일 정도로 무지 놀았습니다.”
정 교수의 첫 작품은 2000년 나온 해부학 학습만화였다. 하지만 전문적인 해부학 지식에 만화를 곁들여 설명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제가 봐도 화가 날 정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작품부터는 힘을 뺐다. 복잡한 해부학 지식은 줄이고 유머를 가미했다. 그때부터 정 교수는 지인과 술자리에서 나온 농담까지 틈틈이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정 교수는 그림 실력은 자신 없어 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한때 자신은 글만 쓰고 전문 만화가에게 그림을 맡기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만화에서 본 듯한 개성 없는 캐릭터가 성에 차지 않았다. “그 뒤부터는 무모하지만 용기를 내서 제가 직접 그립니다.”
그동안 모든 작업을 혼자 하던 정 교수에게 몇 년 전부터 ‘문하생’이 생겼다. 정 교수의 의대 제자이자 그의 장남인 정범선 씨(28·군복무 중)다. 아들 정 씨는 정 교수를 따라 해부학을 전공했다. 아직 공부할 게 많다 보니 틈틈이 아이디어를 내거나 정 교수의 작업을 돕는다.
취미로 시작한 만화가 이제는 직업이 됐다. 정 교수는 자신의 만화를 주제로 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올 1월에는 해부학 만화가 청소년과 어린이 교육에 효과적이라는 내용의 논문이 해외 학술지 ‘해부과학교육’ 표지 논문으로 실렸다. 자신의 모든 만화는 개인 홈페이지(anatomy.co.kr)에서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영문판도 있다. 실제 그의 홈페이지는 미국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접속한다. 방문자 3명 중 2명이 한국인이며 해외 방문자를 다 합치면 1000명을 조금 넘는다.
“제 목표는 해부학 만화를 그리는 해부학 교수가 한국에 있다는 걸 해외에 알리는 겁니다. 가수에 비유하면 훌륭한 가수보다는 단 한 곡이라도 좋으니 해외에서 알아주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마치 ‘싸이’처럼요.”
“저보다 닥터 단감이 유명해지길 바라요”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임상강사 유진수 씨(32)의 명함엔 이름 대신 ‘닥터 단감’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다. 그의 필명이다. 유 씨는 의대 동기였던 이어진 씨(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의사) 등과 동아일보에 ‘닥터 단감’을 연재하고 있다.
유 씨가 의학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건 의대 졸업 후 환자를 보면서 느낀 갈증 때문이다. 환자는 정확하면서도 쉬운 의학 정보를 원했다. 하지만 여러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환자 개개인의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각종 의학 서적,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는 많았지만 쉬운 정보는 부정확했고 정확한 정보는 너무 어려웠다. 그 간극을 메우고자 2012년 여름 의학 만화를 그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잠잘 시간마저 부족한 인턴 시절 만화를 그리는 건 쉽지 않았다. 닥터 단감이라는 캐릭터는 2012년 여름 탄생했지만 충수돌기염(맹장염)을 주제로 한 첫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1년 6개월이 더 걸렸다. 맹장염에 왜 걸리는지, 떼어내면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환자를 위해 그린 작품이었다. “지금 보면 많이 허접하지만 제 첫 작품이라 그런지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입니다.” 시작이 반이었다. 그는 틈틈이 만화를 그렸고 2015년 11월부터 1년간 의학 전문지 ‘정신의학신문’에 닥터 단감 시즌 1을 연재했다.
시즌 1을 마치고 시즌 2를 할지 말지 고민하던 유 씨에게 한 통의 e메일이 왔다. 반가운 이름이었다. 졸업 후 연락이 끊겼던 의대 동기 이어진 씨(32)였다. 이 씨는 의대를 졸업하고 남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남극 세종기지에서 공중보건의사로 일했다. KAIST 미래전략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금은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의사로 근무 중이다. 평소 유 씨의 만화를 챙겨 봤던 이 씨는 유 씨에게 “의사가 그리는 만화는 아직 많지 않으니 콘텐츠로서 가치가 크다”고 응원했다. 그 한마디가 동아일보에 닥터 단감 시즌 2를 연재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
유 씨는 현재 이 씨와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씨가 대학원 동기 정지훈 씨(37·영어동영상교육 업체 ‘프랩하우스’ 대표)도 합류했다. 그림은 유 씨가 그리지만 소재와 내용 구성, 메시지 등 거의 모든 과정은 함께 결정한다.
지난달 말 군의관 복무를 마친 유 씨는 다시 메스를 들었다. 병원에 복귀하면 만화를 그릴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 닥터 단감 시즌 2 여러 편을 미리 그려뒀다고 했다. 당장 시간을 내기 힘들겠지만 여유가 생기면 다시 만화를 그릴 생각이다. 바쁜 와중에 까다로운 의학 만화를 꾸준히 그리는 이유를 물었다.
“제 꿈은 사람들이 궁금한 의학 정보가 있으면 인터넷에 ‘닥터 단감’을 검색할 정도로 유명해지는 겁니다. 또 유치원 다니는 제 딸과 또래 아이들을 위한 의학 만화책을 내고 싶어요.” 유 씨의 만화는 블로그(blog.naver.com/jsr4ever), 닥터 단감 웹사이트(doctordangam.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성공한 의학 만화 만들려 뭉친 동갑내기 3인방
강원 춘천시 하나내과의원 박성진 원장(내과 전문의), 박영수 원장(가정의학과전문의), 검진실장 신성식 씨는 진료 시간이 끝나면 가운을 벗고 병원 위층 사무실에 모인다. 이곳은 지난달부터 연재를 시작한 의학 웹툰 ‘초음파의 신’ 작업실이다.
이들은 직장 동료이자 1967년생 동갑내기 친구다. 박성진 원장과 박영수 원장은 의대 만화 동아리에서 같이 활동한 대학 동기이자 하나내과의원을 함께 운영하는 동업자다. 전문 만화가인 신성식 씨는 ‘의학 만화를 같이 그려보자’는 박성진 원장의 제안에 솔깃해 2010년 이 병원에 취직했다. 박성진 원장은 ‘만화 그리는 의사’로 의료계에선 꽤 알려진 유명 인사다. 그는 2000년 의약 분업으로 한창 의료계가 시끄러울 때 의협신문에 만평을 그렸고 이후 항생제를 주제로 그린 만화를 엮은 단행본 ‘만화 항생제’까지 펴냈다.
최근 연재를 시작한 ‘초음파의 신’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제대로 된 의학 만화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때마침 선배가 초음파 관련 만화를 그려 달라는 제안을 해 왔죠.” 그 선배가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소화기내과의 백순구 교수다.
하지만 박 원장이 보기엔 초음파를 주제로 한 의학 만화는 일반 독자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그래서 새로운 형식의 만화를 제안했다. 일반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스토리에 공을 들이되 전문적인 의학 정보는 링크를 통해 백 교수의 유튜브 강좌에서 볼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초음파의 신은 우여곡절 끝에 외딴섬 진료소에 근무하게 된 사고뭉치 1년 차 내과 전공의가 서울 유명 대학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를 우연히 만나 성장한다는 내용이다. 준비에만 3년이 걸렸다. 스토리는 주로 박성진 원장이 담당했고 그림은 신성식 씨가 전담했다. 박영수 원장은 웹사이트 운영, 사전 취재 등을 도왔다. 웹툰 속 배경인 섬 진료소 취재를 위해 지난해 여름휴가를 내고 남해안 섬들을 답사하기도 했다. 네모난 컷에 그렸던 만화와 달리 모바일에서 보기 편하게 웹툰 형식으로 만들었다. 지난달에는 전용 웹사이트(www.meditoon.net)를 열었다. 최소 100회 분량을 목표로 시작해 현재 3회까지 연재됐다.
“국내에는 전문가와 협력해 만든 전문 만화 중 성공한 작품이 드물어요. 요리 만화 정도죠. 이번 작품이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의학 만화가 되는 게 꿈입니다.”
환자에게 정확한 의학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병을 잘 고치는 것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전문 용어로 된 의학 정보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은 덧셈을 갓 배운 아이에게 인수분해를 설명하는 것만큼 어렵다. 설명하는 의사와 듣고 있는 환자 모두 답답하기만 하다. 의사와 환자 간 신뢰가 쌓일 공간은 점점 좁아진다. 3년 전 회원 6명으로 시작한 의생명과학 만화 연구회는 현재 17명으로 회원이 늘었다. 이들의 노력이 의사와 환자 간 간극을 채워주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앞으로 매주 월요일 동아일보 건강면 ‘만화 그리는 의사들’ 코너에 육아 정보를 담은 ‘초보엄빠’가 새로 연재된다. 소아청소년과전문의 허진호 씨가 기획과 자문역을 맡고 부인 윤유정 씨가 그린 만화다. 현재 건강면에 연재 중인 ‘몸 지킬 박사’(정민석 교수) ‘닥터 단감’(유진수 이어진 정지훈 씨)에 이어 ‘초보엄빠’ 순으로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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