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소년은 중학교 1학년 때인 어느 날 아버지와 큰형이 심하게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큰누나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남은 자식들을 키워야 하는 소년의 아버지는 “수술해도 소용없지 않느냐”고 했고, 대학생인 큰형은 “수술이라도 해보자”고 맞섰던 것.
소년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두 사람의 언쟁을 들으며 조용히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가족은 수술을 포기했고 누나는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했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주말을 맞아 집에 내려와서야 뒤늦게 누나의 죽음을 안 소년은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의사의 길을 다시 한 번 다짐했다.
‘개천에서 난 용’ 소리를 들었던 소년은 나중에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잊지 못할 만남을 가졌다. 의대 본과 4학년 때인 1989년 서울대병원 원목실의 미국인 부제(副祭)를 돕는 자원봉사를 했는데 이때 위암 말기 환자와 인연을 맺은 것. 이 환자가 통증으로 신음할 때 옆에서 성경을 읽어주곤 했던 그는 누나의 고통이 생각나 환자의 임종 직후 서럽게 울었다.
누나의 죽음으로 소년이 의사가 됐다면 누나의 고통을 일깨워준 이 환자의 죽음은 그가 말기 암 환자들의 삶의 질과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그 소년이 바로 ‘웰다잉(well dying) 전도사’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들에게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선물하는 의사’라는 평가를 받는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가 서울대 의대 윤영호 교수(53·가정의학 전문의)다.
8일 서울대 의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조금 멋쩍어했다. 동명이인이라는 인연 덕분에 평소 알고 지내던 기자가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취재 수첩을 꺼내자 “독자들이 보면 속된 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지 않겠느냐”고 걱정했다. 그러나 “웰다잉 문화 확산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자 얘기를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한국인은 어떤 죽음을 원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최근 들어선 임종 직전까지 심폐소생술과 고가 항암제 등으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느라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이 평가한 한국인의 죽음의 질 지수가 최하위권인 점에 비춰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추세를 반영한 게 바로 지난해 초 국회를 통과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치료 결정에 관한 법률(웰다잉법)’이다. 이 법은 연명의료 대신 통증 완화, 상담 치료를 제공하는 호스피스 서비스를 암 환자뿐 아니라 다른 질병의 말기 환자에게도 확대 적용하고 연명의료에 관한 환자 개인의 결정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8월 일부 시행을 앞둔 이 법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윤영호 교수다. 그는 2015년 초 호스피스·완화의료국민본부(국민본부) 결성을 주도해 여론화 작업을 하는 등 이 법 통과의 숨은 주역 가운데 한 명이다.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세연 바른정당 의원이 주도해 그해 3월 결성한 ‘웰다잉 문화 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도 이 법 통과에 힘을 보탰다.
“2015년 말 이 법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의 심의를 앞뒀는데 순번이 뒤로 밀린 상태여서 19대 국회에서는 힘들겠다고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무렵 돌아가신 어머니 장례를 마치고 삼우제를 지낸 다음 서울로 올라오는 날 ‘복지위 법안심사소위가 이 법을 다음 날 단독으로 심의할 방침이라고 한다’는 보건복지부 관계자의 연락을 받았다. 이후 일사천리로 심의가 진행돼 다음 해 초 이 법이 통과됐다. 많은 분들의 노력 덕분이지만 나로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 법 제정을 계기로 웰다잉 문화가 확산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하는 웰다잉이란 한마디로 과거 우리나라의 호상(好喪)과 비슷한 개념이다. 집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물론 이를 위해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를 24시간 돌볼 수 있는 가정 호스피스 제도 활성화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다만 여전히 이 법에도 미진한 점이 있다고 아쉬워했다. 우선 말기 환자의 연명의료 계획서만 하더라도 이의 작성에 대한 정보 제공이나 설명을 건강보험 수가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 탓에 활성화되기 힘들다는 것. 그는 또 호스피스·완화의료 시스템에 대한 충분한 재정 지원이 없는 것도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환자가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면서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돌볼 것인지, 주변 사람에게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도록 그의 삶을 어떻게 완성시켜 줄 것인지, 또 환자와 가족의 부담을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에 대해 정부가 더 고민해 주기를 바란다.”
윤 교수의 이력은 호스피스·완화의료 제도화와 맞물려 있다. 일부 대학병원이 종교적 차원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해온 반면에 그는 이를 제도화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그는 정부가 2002년 호스피스·완화의료 시범사업을 시작할 때도 숨은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2000년 국립암센터 초기 멤버로 합류한 그가 복지부 관계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였다.
그가 레지던트 시절 호스피스·완화의료에 입문했을 때만 해도 호스피스는 성직자나 간호사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그가 1990년 서울대 의대 가정의학과 의국(醫局) 입국식에서 “호스피스를 본격적으로 하려고 가정의학과를 지원했다”고 했을 때 선배들도 그런 반응을 보였다.
그는 국내 병원에 적극적인 통증 관리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1990년대 후반 서울대병원 전임의 시절 시간이 날 때마다 은사인 허대석 혈액종양내과 교수의 회진에 참여한 게 계기였다. 그는 당시 말기 암 환자들이 퇴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가장 큰 이유가 대형 병원에 있어야 통증을 포함한 증상 조절이 쉽다는 점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국립암센터에 합류한 다음 해인 2001년 삶의질향상연구과를 신설해 책임자가 된 후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매달렸다. 통증 평가 연구의 개척자이자 세계 최고의 암 치료 전문병원 MD앤더슨센터의 석좌교수인 찰스 클리랜드의 도움을 받아 한국형 간이통증평가 설문을 개발한 그는 이를 토대로 국내 대학병원 8곳의 통증 관리를 평가했다. 결과는 절반 이상이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의사가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하면 ‘마약 중독자로 만들려고 하느냐’는 항의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는 자신의 임상 경험뿐 아니라 암 환자 2만 명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조사 결과를 봐도 마약성 진통제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결국 이 조사는 2004년 복지부 암성 통증관리위원회 설립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 출범 당시 간사로 참여해 의료진을 위한 통증 관리 권고안 마련, 환자와 가족을 위한 교육 자료 제작 등 지금도 보람을 느끼는 여러 사업을 진행했다.”
국립암센터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 준비 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의관을 마치고 서울대병원에서 전임의로 근무할 때인 1997년 그는 국립암센터 설립 논의를 듣고 이곳에 지원했다. 그러나 그해 말 찾아온 외환위기로 국립암센터 설립은 물 건너 갔고, 졸지에 갈 곳을 잃은 그는 선배들의 도움으로 한 공기업이 운영하는 종합병원으로 가게 됐다.
“처음엔 좌절하기도 했으나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그간 미진했던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말기 암 환자의 통증 관리가 필요하다’ ‘말기 암 환자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결론을 담은 연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때 축적한 연구 성과가 나중에 국립암센터로 옮겼을 때 큰 힘이 됐다.”
웰다잉법 통과 이후 그의 관심은 웰빙으로 이동했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웰다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1년 국립암센터에서 서울대 의대로 옮긴 것도 웰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서였다. 그는 앞으로 10년간 웰빙에 매달릴 예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웰다잉 전도사로서 어떤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까. 그는 몇 년 전 한 행사에 참석해 죽음이 임박한 상황이 오면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는 내용의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함과 동시에 해부학 실습용으로 모교에 시신을 기증한다는 데에 서명했다. 어느 젊은 의학도가 자기 몸을 가르며 가치 있는 지식을 얻기 바라는 의미에서다.
▼“걸음마 뗀 웰다잉법… 가정 호스피스 활성화 등 갈길 멀어”▼
30.9%, 사망 한달전에도 항암치료… 미국보다 3배 이상으로 높은 수준 “죽음 받아들이는 교육도 필요”
잘 알려진 대로 우리 국민의 사망 원인 1위는 각종 암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인구 10만 명당 사망자 수는 541.5명이었는데, 암 사망자는 150.8명이었다. 암 발병자도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2010년 20만7450명으로 처음 20만 명을 넘어선 이래 2013년 22만7188명으로 증가했다. 2014년엔 21만7057명으로 다소 감소했다.
암 환자들의 의료 이용 행태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오래전이긴 하지만 윤영호 교수가 서울대병원 허대석 혈액종양내과 교수와 함께 2004년 한 해 동안 국내 병원 17곳에서 암으로 숨진 37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망 한 달 전에도 30.9%가 항암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9%에 비해 3배 이상으로 높은 수준이다.
윤 교수는 “지금이야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임종이 가까운 시점에서도 많은 말기 암 환자가 불필요한 항암 치료를 받는다는 의미”라면서 “국가가 능동적으로 호스피스·완화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무의미한 치료보다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행기 암의 경우 항암 치료를 반복하면서 그 효과가 점점 약해지고, 암이 진행함에 따라 통증 및 증상은 점점 심해진다. 또 환자와 가족의 불안, 두려움 등 심리적 고통도 커진다. 호스피스·완화의료가 필요한 이유다. 호스피스·완화의료는 한마디로 회복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의 삶의 질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돌봄을 제공하는 의료의 한 분야다. 완화의료는 말기 환자와 가족을 중심으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영적인 문제까지 포괄적으로 돌본다. 호스피스는 죽음 직전의 말기 환자가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다. 완화의료와 호스피스는 접근하는 시기와 방법에서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담당 의사와 마취통증의학과, 사회복지사 등이 팀을 이뤄 총체적인 돌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장을 지낸 허대석 교수가 “(치료에 중점을 둔) 기술 중심의 의료는 의사라는 뛰어난 선수 한 명의 개인기로 주도하는 경기지만, 완화의료는 팀워크 중심의 경기”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적 의미의 호스피스는 1967년 영국인 여의사 시슬리 손더스가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호주 관구 소속 수녀들이 건립한 강원 강릉시 갈바리의원에서 1978년 처음으로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84년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에서 체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윤 교수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의학적인 수준에서 말기 환자의 통증을 관리해 주고 가족을 돌봐주는 수준의 완화의료 서비스는 제공하지만 호스피스 서비스는 아쉬운 점이 많다. 편안한 죽음을 맞게 해 주고 주변 사람들이 그 환자의 삶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호스피스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한다면 이 점에서는 아직 멀었다. 무엇보다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원봉사자도 많이 양성해야 하고 사회적 인식도 변해야 한다. 특히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교육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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