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살인업자 형욱(유해진)은 손목시계와 손에 묻은 피를 닦기 위해 들른 대중목욕탕에서 실수로 비누를 밟는다.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져 머리를 부딪힌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난해 10월 개봉한 영화 ‘럭키’는 40대 킬러가 32세 배우 지망생으로 새 삶을 사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노안에다 가난한 형욱에게 측은지심을 느껴 도움을 주는 소방대원 리나(조윤희)와 사랑에 빠지는 등 기억상실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서사적 장치다.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기억상실은 단골 소재가 돼 왔다. 2009년 인기를 끈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의 이민호(구준표 역), 2002년 ‘겨울연가’에서 배용준(이민형 역)도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사랑하던 여자 주인공을 알아보지 못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뒤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설정이 심심찮게 나온다. 과연 사실일까? 최근 국내 연구진이 외부 충격에 의한 ‘외상성 치매’가 일어나는 원인을 과학적으로 밝혀내 화제다.
김명옥 경상대 응용생명과학부 교수팀은 최근 물리적인 외부 충격을 받은 환자에게서 인지 능력과 기억력이 감소하는 원인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신경과학분야 국제학술지인 ‘세러브럴 코텍스(Cerebral Cortex)’ 7월 10일자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외상성 치매 진단을 받은 환자의 60%가 알츠하이머성 치매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리면 세포를 사멸시키고 인지 기능을 감소시키는 성분이 생겨나고, 신경섬유 매듭이 비정상적으로 만들어진다. 또 염증이 생기거나 신경세포가 소실되기도 한다.
연구팀은 두개골에 물리적 충격을 가해 만든 외상성 치매 쥐에게서 정상 쥐보다 ‘c-Jun 인산화효소(JNK)’가 많이 활성화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JNK는 세포의 증식과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효소다. 연구팀은 JNK가 활성하지 않도록 억제하자 외상성 치매 증상들이 억제되는 것도 관찰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이번 연구는 외상성 치매가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이어지는 것을 예방하거나 속도를 늦추는 새로운 치료제 개발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치료제가 개발되면 진부한 ‘기억상실증’ 드라마도 없어질까.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기억상실 코드는 한국 드라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장애를 줄 수 있는 극적 장치”라며 “지금까지 그랬듯 질타와 이해를 동시에 받으며 드라마 속에서 변주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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