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물을 판 봉이 김선달은 희대의 사기꾼으로 통하지만 오늘날 그 후손들은 페트병에 담긴 물을 사먹는 것이 일상이 됐다. 우리나라의 생수시장 규모가 2016년 기준 7000억 원대로 성장했다니 시대와 환경의 변화는 늘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고 우리 삶을 바꿔나간다.
21세기 들어 세계 곳곳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커지면서 김선달도 무릎을 치게 만들 획기적인 시장이 생겨나고 있다. 바로 태풍과 홍수, 허리케인 등 예측하기 힘든 대형 자연재해와 연계된 ‘대재해 채권(catastrophe bond)’, 이른바 ‘캣본드’다. 보험사의 인수능력을 넘어서는 자연재해의 금융 리스크를 시장금리보다 높은 이율의 채권을 발행해 투자자들에게 전가하는 형태의 위험관리기법이다. 쉽게 말해 정해진 기간에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투자자가 돈을 버는 구조다. 투자손실위험이 있지만 대형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연 5∼7%의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캣본드는 1990년대 중반 미국에서 처음 도입된 이후 이상기후현상으로 인한 대형 자연재해의 발생 빈도와 비례해 급격히 성장했다. 올해 8월 말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약 100억 달러(약 11조 원)의 캣본드가 신규 발행됐다. 20년 전과 비교해 무려 10배나 증가한 것이다. 2017년 현재 캣본드의 규모는 총 300억 달러(약 33조 원)에 이른다.
전 세계 캣본드의 4분의 3은 선진국의 자연재해 리스크를 담보하기 위한 것이다. 기후변화에 취약한 개도국을 위해 국제기구가 채권을 발행하기도 한다. 세계은행은 2014년 카리브해 지역 16개 국가에서 3년간 발생할 수 있는 지진과 허리케인에 대해 3000만 달러(약 305억 원)의 캣본드를 발행했다. 올해 8월에는 멕시코의 지진과 사이클론에 대해 현재까지 최대 규모인 3억6000만 달러(약 4000억 원)의 캣본드를 내놓았다.
우리나라는 주로 사모펀드 형태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어 아직까지 본격적인 시장을 형성했다고 보기 이르지만, 올해 상반기에만 약 1500억 원에 가까운 투자금이 몰렸다고 한다.
최근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 ‘하비’로 캣본드 투자자들은 큰 손해를 보았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텍사스의 캣본드가 담보하는 자연재해의 범주에 ‘홍수’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발행한 280여 건의 캣본드 중 투자자 손실이 발생한 경우는 10건 내외에 불과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초대형 자연재해 발생 위험이 나날이 증가하는 현 시점에서 캣본드는 금융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솔루션으로서 잠재력이 크다. 기상현상을 자본으로 거래하는 시장은 분명 김선달도 상상하지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 조상들은 가뭄에는 기우제, 비가 계속 뿌리면 기청제, 눈이 오지 않으면 기설제를 지냈다. 쌀에서 돈으로 대상은 바뀌었지만 하늘에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는 방식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신령님이시여! 바라건대 때에 맞추어 비를 그치고 비를 내려주며, 때에 맞추어 조화로운 바람을 불게 하시어….” 어찌됐건 시민들도 투자자들도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한마음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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